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러-우크라 전쟁 ‘바티칸 카드’ 통할까 [특파원 칼럼]

한겨레
원문보기

러-우크라 전쟁 ‘바티칸 카드’ 통할까 [특파원 칼럼]

서울흐림 / 1.7 °
지난 18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레오 14세 교황 즉위 미사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앞줄 왼쪽)이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둘째 줄 왼쪽 두번째)과 제이디 밴스 미국 부통령(첫째 줄 오른쪽 끝)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8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레오 14세 교황 즉위 미사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앞줄 왼쪽)이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둘째 줄 왼쪽 두번째)과 제이디 밴스 미국 부통령(첫째 줄 오른쪽 끝)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AFP연합뉴스




장예지 | 베를린 특파원



바티칸에서 떨어진 로마 시내 스페인 광장엔 교황청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있다. 대사관 건물은 403년 전인 1622년부터 스페인과 교황청을 잇는 외교 공간으로 쓰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외교 공관으로 꼽힌다. 근대국가 성립 훨씬 전부터 외교의 주체로 활동해온 교황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티칸은 올해 1월 기준 184개국과 수교를 맺었다. 여기엔 물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포함돼 있다.



지난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뒤 레오 14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바티칸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중재 공간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다. 특히 지난달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 참석을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예배당에서 독대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잔상에 남았다. 국가적 이해를 초월한 중립적 공간이자, 종교적 권위가 있는 바티칸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교황 레오 14세는 지난 8일 선출된 뒤인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처음 집전한 부활 삼종기도에서도 우크라이나의 항구적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6일엔 레오 14세가 바티칸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 회담 장소로 제안했다는 보도가 유럽 언론에서 나왔다. 같은 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전쟁 3년여 만에 직접 협상을 진행했지만 큰 소득 없이 90여분 만에 마무리됐다. 양국은 후속 협상을 개최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해 추가 대화의 물꼬는 터둔 상태였다.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한 트럼프 대통령은 바티칸에서 협상을 여는 데 화답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까지 레오 14세 교황이나 교황청은 여기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진 않고 있지만, 간접적으로 바티칸의 의중은 전해지고 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 21일 레오 14세와 직접 전화 통화를 했다며 “교황은 바티칸에서 다음 회담을 개최할 준비가 돼 있음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다음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바티칸에서 또 한번 실무회담을 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물론, 합의점이 보이지 않는 양국의 평화 협상에서 ‘바티칸 역할론’이 얼마나 기대에 부응할지는 미지수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며 두 나라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양국의 대화를 끌어내진 못했지만, 포로 교환이나 러시아로 끌려간 수백명의 아동 송환 등 인도주의적 사안에선 제한적이나마 성과를 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비판하고 푸틴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모두 같은 “형제”라 부르는 등 러시아를 가해자로 확정하는 어휘를 쓰진 않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확장이 러시아 침공을 야기했을 수 있다는 평가를 하며 양국 모두와 대화하려는 접근을 취해 우크라이나에선 교황에 대한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새롭게 바티칸의 외교를 지휘할 레오 14세가 꽉 막힌 협상 정국에서 어떤 지혜를 발휘할지도 주목된다. 유구한 교황청 외교사에서 레오 14세가 평화를 위한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penj@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