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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조선의 법전, 대한민국의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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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조선의 법전, 대한민국의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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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법전(法典)의 나라였다. 건국 직후부터 법전을 편찬하기 시작해서 국운이 기울어가는 19세기 중반에도 법전 편찬을 그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2년 만인 1394년에 <조선경국전>이 나왔다. 건국에 공이 많고, 건국 직후 조선이 제도적 기틀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정도전의 저술이다. 3년 뒤 1397년에는 조선왕조 최초의 공적인 법제서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나왔다. <조선경국전>이 정도전 개인의 저술인 반면에 <경제육전>은 좌의정 조준의 책임 아래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이후에도 현실의 필요에 따라 법령들이 계속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이렇게 쌓인 법령들 사이에 모순이 생기거나 이미 현실과 어긋난 법령들이 적지 않게 됐다. 그에 따라 세조는 1455년 즉위 후에 기존의 법전과 법령을 전반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했다. 법령들을 자세히 살펴 현실에 맞게 확립하려는 목적을 이름으로 삼은 기구였다. 그에 따라 1460년(세조 6년) 7월에 제일 먼저 재정·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戶典)’을 펴냈다. 1461년 7월에는 ‘형전(刑典)’을, 1466년에는 ‘이전(吏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공전(工典)’을 차례로 완성했다. 하지만 이것들을 곧바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그러던 중에 세조가 사망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재검토와 수정이 계속됐고, 1471년 1월1일부터 실행하기로 예정됐다. 하지만 수정본에 누락된 조문들이 발견돼 실행이 1474년으로 미뤄졌고, 그 후 또다시 재검토 요청이 제기돼서 마침내 1485년에야 최종적으로 실시됐다. 이로써 조선 건국부터 93년, 세조가 ‘호전’을 개정해 펴낸 때부터 25년이 걸려서 <경국대전>이 마침내 완성됐다.

<경국대전> 시행 후에도 조선의 법전 편찬은 계속됐다. 굵직한 작업만 꼽아보아도 1698년(숙종 24년) <수교집록(受敎輯錄)>, 1746년(영조 22년) <속대전(續大典)>, 1785년(정조 9년) <대전통편(大典通編)>, 1865년(고종 2년)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이 마지막으로 펴낸 법전인 <대전회통>은 법조문마다 <경국대전>과 그 이후 수정 보완된 내용이 함께 기록됐다. 그 때문에 하나의 법조문 안에서 조선왕조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이는 <경국대전>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현실 변화에 맞춰 수정, 보완됐지만 조선이 그 근본 정신을 계승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 체제를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인 정체(政體)에 맞춰 최적화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은 비록 왕정과 공화정이라는 정체의 차이가 있지만, 이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화정에서 최적화에 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공화정은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들어설 새 정부에서 정부기구나 사법기구에 대한 조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이 역시 긴 시간으로 보면 그런 최적화의 과정이다.

근래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주로 정치인들 중심으로, 권력구조 변경 문제에 집중해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런 모습은 국민의 뜻을 수렴하는 것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동료 정치인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는 대한민국이 1987년 이후 쌓아온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로운 헌법에 대한 논의는 여러 기득권 ‘엘리트’들이 아닌 국민이 대한민국의 실제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구현할지에 집중돼야 한다. 조선이 거듭된 법전 편찬에도 기존 법전을 폐기하지 않았던 것 역시 건국의 본래 이념을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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