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리는 광진구 자양동 건국대 인근 ‘양꼬치 거리’에서 과잠을 입은 청년들이 혐중 시위를 하고 있다. 자유대학 유튜브 갈무리 |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또 다른 바이러스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냈다. 바로 아시안을 향한 인종차별이었다. 다수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습격을 받았고,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등 도시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혐오 범죄에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 일부 재미 한인은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판매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중국계는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아시아계는 예외’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 이면에는 또 다른 형태의 차별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혐오 대상의 ‘타당성’이 아니라, 혐오 그 자체다. 그 당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항변해야 했다. 그들의 무고함에 대해,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떳떳함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개별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역사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마녀사냥이 어떻게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직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 혼란을 조장했다는 거짓 소문으로 수천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악마화를 통해 국정 혼란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역사적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다음 사례는 어떤가? 1941년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 정부는 대부분 자국민이었던 일본계 미국인 12만명을 3년 동안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었다. 실질적으로 내통이나 스파이 활동 증거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일본계 미국인들은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로 불리며 미국 현대사의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과 싸우면서, 동시에 자국 내 일본계를 수용소에 가두는 이중적 행보를 보였다. 미국의 흑인 차별,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위구르) 무슬림 민족 탄압 등 특정 집단이 혐오와 비인간화의 대상이 되는 비극은 시대와 장소만 달리할 뿐, 반복되어 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수백명의 청년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중국인을 향해 인종차별적 비속어를 외치고 행인을 위협하는 사건이 있었다. 온라인과 태극기 집회를 통해 퍼지던 극단적 혐중 정서가 거리에서 표출된 것이다. 일부 극우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은 이런 혐오의 위험성을 경계하기보다, 오히려 청년들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고 있다. ‘반공주의’와 ‘인종주의’를 결합시킨 이 혐중 정서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대선 기간에도 '반중' 정서를 부추기는 자극적 정치 구호가 끊이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 속에서 대중의 불안과 욕구를 이용해 특정 집단을 악의 근원으로 지목하고, 집단적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는 국가 체제에 주목했다. 특히 국가가 ‘질서’와 ‘정의’를 명분으로 삼아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할 때, 대중의 도덕적 판단이 어떻게 마비되는지를 분석했다. ‘악의 평범성’ 개념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타자를 혐오하고 억압하는 현상을 비판한 그의 통찰은 유대인 수용소 이송을 기획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오늘날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누비는 청년들을 우리가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이 적대시하는 중국인들도 물론 ‘악’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악은, 사유를 멈춘 대중과 그들의 불안을 조직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일 것이다. 중국 중앙집권 체제의 폐해와 일부 정책의 위험성은 분명 존재한다. 현실 세계에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는 신중히 대응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국내 거주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정당한 대응이 될 수 없다. 국가 차원의 문제를 특정 민족에 대한 증오로 치환하는 것은, 결국 사회 전체를 혐오의 악순환에 빠뜨릴 뿐이다.
코로나19 이후,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혐오에 맞서 전례 없는 연대를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로 자국 민족끼리 뭉쳤다면 코로나19를 거치며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또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지닌 시민들과 함께 행진하며 느꼈다. 혐오 받는 집단을 외면한다면, 그 혐오의 화살이 언젠가 나와 내 공동체를 겨눌 때, 아무도 우리를 위해 나서주지 않을 것임을.
대한민국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의 ‘악’을 직시하고, 비판적 사유가 결여된 혐오의 반복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민자들이 다시 악마화되며 추방당하고 있는 트럼프 2기의 미국과는 달리, 한국 사회는 성찰을 바탕으로 연대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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