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
김용석 | 철학자
유토피아(Utopia), 이 말은 오늘날 거의 잊힌 단어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역사에서 이상 사회를 실현하려 했던 시도와 실패에 따른 실망 때문일 것이다. 유토피아적 상상을 실제로 구현하려는 순간 실망의 씨앗은 움튼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고유명사로 탄생했다. 토머스 모어가 1516년 발간한 책에서 어떤 섬나라의 이름을 지칭하는 말로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책의 원제가 길다 보니 ‘유토피아’는 책의 축약된 제목이기도 하다. 모어는 라틴어로 책을 썼지만,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뜻의 접두사(ou)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를 합성해 명사형 접미사(ia)를 붙여서 만들었다. 결국 유토피아는 ‘부재하는 장소’ 또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가 일반명사가 되면서 여러가지 뜻이 혼란스럽게 가미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상향, 완벽한 사회 등이다. 그러나 유토피아 사상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없는 곳’이라는 이 역설적 의미가 중요하다. 없는 곳은 당연히 있는 곳이 아니며, 없는 곳을 있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토피아 사상이 제시하는 ‘다른 세상에 대한 묘사와 설명’을 ‘새롭고 완벽한 나라를 위한 설계도’로 여겨 실천에 옮기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모어의 저술을 비롯한 유토피아 사상은 ‘지속적인 변화를 위한 기획’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완벽을 주장하지 않는다. 완벽하면, 자신을 본으로 삼아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꾼 다음 더 이상 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어도 최상, 최고 같은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이는 수사적 과장법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인데 이들이 모여 완벽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건 상상의 영역에서도 어설픈 허구가 된다. 유토피아가 변화의 기획이라는 건, 그 시발점이 현실에 대한 비판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모어의 저술에서도 분명하다. 모어의 ‘유토피아’ 제1권은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고, 제2권은 상상의 나라에 대한 묘사이다. 상상의 나라는 앞으로 구현해야 할 완벽한 세상을 위한 청사진이 아니라, 삶을 개선하기 위해 현실을 다르게 비춰주는 다면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상상의 나라에서 현실과 ‘다르게’ 묘사된 것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가능성들이다.
모어의 저서에는 라틴어로 ‘멜리오르’(melior), 곧 ‘더 나은’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더 나은 정부”라는 표현도 있고, 유토피아는 “더 나은 것은 무엇이든 즐거이 받아들인다”는 표현도 있다. 유토피아는 이렇듯 자기 변화도 꾀한다. 이와 연관하여 고대에 이상국가론을 주창했다는 플라톤도 그리스어로 ‘더 나은’이라는 뜻의 ‘벨티온’(beltion)이란 표현을 각별히 썼음을 다시금 음미해볼 만하다. 지금보다 더 낫다는 것은 현실에 발붙이고 나아가자는 뜻이다.
열렬한 유토피아 사상가였던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했듯이 “사고는 초월하는 행위”다. 곧 넘어서는 행위다. 유토피아적 사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실제의 초월은 단순히 열광하거나 추상적으로 상상하면서 공허한 무엇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현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무엇을 포착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어의 작품을 거울삼아 내가 제안하는 유토피아 정신은 ‘삼각 교수대’와 ‘황금 요강’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는 것이다.
모어는 당대 영국에서 부자들의 욕심과 왕들의 야심을 비판했지만, 무엇보다도 가혹한 형벌이 일상화한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법의 지배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조롱했다. 당시 가벼운 절도범조차도 모두 교수형에 처했는데, 이에 등장한 것이 삼각 교수대다. 목줄을 더 많이 달기 위해 일자 교수대 세개를 삼각형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래도 도둑은 전혀 줄지 않았다.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훔치는 길밖에 없다면, 아무리 엄벌을 가해도 절도를 막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계 수단을 마련해주어, 처음엔 도둑이 되고 다음에는 시체가 되는 절박한 필요에 아무도 봉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라가 할 일 아니겠는가. 죄에는 벌이라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당연한 현실에서 포착되는 것은 사회 구조 개선이라는 근본적 해결책이지만, 그런 세상에 안주한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한편 살 만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욕심을 제어하는 게 중요 과제다. 그것은 만인의 복지와 평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서는 이렇게 해결하고 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습관화한다. 어린아이들은 보석으로 구슬놀이를 하다가 더 자라면 유치하다며 그만둔다. 삶에 필요한 용품은 유리나 토기로 아름답게 만들지만, 요강과 같은 불결한 물품은 금으로 대충 만들고, 노예를 묶어두는 사슬도 금과 은으로 만들며, 중한 범죄자에게는 금관을 씌워주기까지 한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금은보화를 경멸하게 하는 모든 방법을 어릴 때부터 일상에서 자연스레 체화한다. 곧 공동체에 구조적으로 스며들게 한다. 발에 차이는 게 금은보화라서, 나라에서는 그것을 수거해 국고에 두었다가 공공사업이나 전쟁 경비 등 공적인 데에 사용한다.
그런데 당대의 끔찍한 현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지만, 유토피아의 대안적 이야기는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물론 언급했듯이 그것을 실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을 일깨우는 방법으로는 아주 효과적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가 말했듯이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가장 강력한 회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 정신은 끔찍한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화끈한 각성을 노린 황당한 헛소리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위한 행로에 일조하고자 한다.
대통령 선거가 목전이다. 더 나은 삶은 가정에서, 지역공동체에서, 나아가 나라의 차원에서 유토피아 정신이 희망하고 염원하는 것이다. 선거는 국가적 차원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통로다. 투표지에 기표하는 순간은 유토피아적 순간이다. 이것이 오늘 유토피아라는 한때 잊혔던 단어를 다시 상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