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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승리’ 밖의 유권자들 [하종강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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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승리’ 밖의 유권자들 [하종강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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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대구 중구 남산동 한 아파트 철망에 장미꽃이 활짝 핀 가운데 제21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대구 중구 남산동 한 아파트 철망에 장미꽃이 활짝 핀 가운데 제21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학기마다 첫 수업은 한 학기 강의에 대한 안내로 시작한다. 흔히 줄여서 ‘오티’(OT)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양과목의 ‘오티’ 수업을 시간을 꽉 채워서 진행하면 융통성 없는 교수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내 첫 수업에는 중간에 생뚱맞게 ‘유의 사항’이 등장한다. “노동 문제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은 아닙니다. 노동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쉬운 설명과 자료로써 이해합니다. 사회과학과 노동 문제 등에 대한 학습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이미 갖춘 학생에게는 새로운 내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가며 부연 설명을 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인 이윤율 저하의 책임을 노동자 계급에 전가하기 위해 자본주의 말기적 쌍생아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학생이라면 한 학기 동안의 수업 내용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친절히 안내한다.



첫 수업이 끝날 때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대기업 정규직 등 ‘귀족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정당하지 않다? 학력과 ‘스펙’이 낮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노력한 정규직을 역차별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희석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지나치게 정치적·투쟁적이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이미 구한 학생이라면 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안내하면서 첫 강의를 끝낸다.



이번 학기 첫 수업이 끝난 뒤 한 학생이 면담을 신청했다. 자신은 이미 그와 같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두 구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할 자료를 구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내 수업을 들어도 괜찮겠냐고 물어서, 흔쾌히 가능하다고 답했다.



두번째 수업이 끝난 뒤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노동 문제에 대한 실상을 직접 들으며 너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데, 한 학기 동안 그 충격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돼서 이 과목 수업을 계속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한 학기 동안 서로 잘 도와가며 감당해보자”고 답했다.



내가 몸담은 학교는 “인권과 평화를 지향하는” 진보적 학풍의 대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진보적’이라고 하지만 흔히 ‘리버럴’(Liberal)이라고 표현되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정도의 자유주의적 성향인데, 한국 사회가 워낙 보수화돼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진보’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시각일 것이다.



최저임금제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에는 “최저임금제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공정한 자본주의’가 가능한 것처럼 착시 현상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완화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하고 “그러한 부정적 측면보다는 노동자 삶의 질을 개선함으로써 체제 변화를 준비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긍정적 측면이 더 크다고 본다”는 의견이 오가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다. 소금은 그 자체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만큼 짠 물질이지만, 소금이 있으므로 많은 음식이 적절한 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소수 의견들이 사회 전체가 어느 한쪽으로 편향돼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문제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청년들이 마땅히 지지할 후보가 없거나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지나치게 좁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 지형을 단순하게 보수·민주·진보 진영으로 구분해 보자면, 민주 진영 유권자의 상당수는 진보 진영 후보를 민주 진영 후보의 표를 빼앗아 가는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민주 후보가 박빙의 차이로 보수 후보에게 패한 2010년 서울시장 선거나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민주 진영 내부에서는 그 박빙의 지지율을 더 얻지 못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는 사람들도 많다.



민주 진영 후보의 압승이 예상되는 이번 대통령 선거야말로 진보 진영 후보를 마음껏 지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총력을 기울여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내란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다 아는 것처럼 이러한 논란을 불식할 수 있는 해법은 결선 투표제 개헌이다. 정치, 정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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