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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오래된 시계를 고쳐 써야 할 때

머니투데이 이윤학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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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오래된 시계를 고쳐 써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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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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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오래된 시계가 여럿 눈에 들어왔다. 망설였다. 고쳐 쓸까, 아니면 버릴까. 요즘 '정년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낡은 시계에 대한 고민과 닮았다. 조지 번스는 "우리는 늙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일을 그만두기 때문에 늙는다"고 말했다. 노동은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의미 그 자체다. 그렇기에 정년은 고용의 종착역이 아닌 인간 생애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응답이다.

정년제는 서구에서 19세기 독일 비스마르크정부의 공적 연금제 도입과 함께 제도화됐다. 1889년 사회보험법 이후 65세라는 연령기준은 사실상 국제적 정년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이 기준은 연금개시와 생애설계의 기준점이 됐고 일에서 복지로 전환되는 이행장치로 기능했다.

한국의 정년제는 일본을 통해 도입됐다. 조선시대엔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 속에서 정년이란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온큐(恩給)제도와 함께 관료 중심의 정년문화가 이식됐고 해방 후에도 공공기관과 대기업 중심으로 정착됐다. 특히 1970년 이후 산업화 시기엔 연공서열형 임금과 결합해 55세 정년과 퇴직금 구조가 일반화됐고 2016년 법정정년이 60세로 연장됐지만 조기퇴직 관행은 여전해 실질적 의미는 퇴색했다.

현재 정년연장과 폐지를 둘러싼 입장은 뚜렷이 갈린다. 연장론은 고령화로 줄어드는 노동력을 보완하고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65세 예정)과 정년(60세) 사이의 간극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간극은 조기 연금수급과 저임금 고령 일자리로 이어지며 연금재정에도 부담을 준다. 그러나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6년 정년연장 이후 55~59세 근로자가 8만명 증가하는 동안 23~27세 청년고용은 오히려 11만명 감소했다.

한편 폐지론은 정년제 자체가 연령차별이며 능력 중심 고용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고령자의 고용 불안정과 저임금화라는 부작용도 분명 존재한다. 결국 이 논쟁은 '정년연장 대 정년폐지'의 단순 구도가 아니라 임금체계, 노동시장 구조, 연금제도, 복지 등을 아우르는 총체적 재설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과 유럽의 사례는 중요한 참고가 된다. 일본은 60세 정년을 유지하되 이후 재고용을 법제화한 '계속고용제도'를 통해 65~69세의 고용률이 50%에 달한다. 독일은 정년을 67세로 상향하는 동시에 '부분은퇴제'를 통해 근로와 연금을 병행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를 마련했다. 반면 프랑스는 64세 정년연장 강행과정에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해 제도개혁엔 사회적 합의가 필수임을 확인해줬다.


이제 한국도 정년제에 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년은 최소한의 기준선으로 유지하되 이후에는 유연한 계속고용제도를 통해 고령자 고용을 이어가야 한다. 동시에 임금체계는 연공서열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개편돼야 하며 연금제도 개혁, 고령자 직무 재설계, 청년층 고용확대가 병행돼야 지속가능한 고용구조가 가능해진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남은 삶의 '가장 좋은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시기다. 정년은 '퇴장의 시점'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시작점'이 돼야 한다. 이제 오래된 시계를 다시 고쳐 써야 할 때다.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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