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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무구조도 도입했지만, 부담만 늘고 금융사고는 안줄었다[금융혁신:성장을 설계하다]④

아시아경제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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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무구조도 도입했지만, 부담만 늘고 금융사고는 안줄었다[금융혁신:성장을 설계하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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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책무구조도 본격 도입됐지만 금융사고 계속 이어져
올해 상반기 금융사고 공시, 작년 상반기 대비 3배 급증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 안되게 제재보다 예방에 초점 두고
제도 실효성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 고민해야
편집자주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금융개혁이 주요 정치 의제로 부상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규제를 조정하고, 은행 건전성 규제 완화,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 구조 전환이 주요 내용이다. 이는 금융이 성장동력의 마중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개혁이다. 한국도 금융정책의 재설계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자본과 대출, 소비자 보호와 혁신, 통제와 자율, 규율과 성장 간의 균형적 재설계가 핵심이다. 차기 정부는 금융을 전략산업 육성과 혁신성장을 지원하는 경제성장의 마중물로 다시 작동시킬 수 있도록, 자율성과 혁신을 살리는 '균형 잡힌 개혁'을 해야 한다. 아시아경제는 대내외 환경이 급변하는 현 상황에서 금융규제의 방향과 과제를 들여다보았다. 본 기획은 '규제를 없애는 개혁'이 아닌,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규제'로의 전환을 핵심 화두로 삼는다.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자율성과 혁신이 공존하는 균형 잡힌 금융 생태계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0억원 이상 금융사고 공시)

(10억원 이상 금융사고 공시)


금융회사의 내부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작년 하반기부터 책무구조도가 은행에 도입됐지만 금융사고는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겉으로 드러나는 금융사고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 많아지고 있어 내부통제의 실효성을 높일 방안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현장에서는 책무구조도가 임원들에게 과도한 책임만을 지우고 있을 뿐, 실제 금융사고 예방에는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선 지금처럼 제재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제도 전반을 재설계해 예방 중심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금융사고 공시, 작년 대비 3배 급증
19일 5개 국내 은행(KB국민, 신한, 하나, 농협, 기업은행)이 올해 들어 공시한 금융사고 발생 건수는 총 15건으로 작년 상반기 공시한 5건에 비해 3배나 증가했다. 하나은행이 5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KB국민은행 4건, 신한, 기업, 농협 등이 각각 2건씩이었다.

금융사고는 외부인에 의한 사기가 대부분이었고 내부인의 횡령, 업무상 배임, 부당대출, 금품수수 등도 있었다. 공시된 사고의 발생 시기는 2021년부터 2025년 초까지 길게 퍼져있었다.

문제는 작년 7월 은행 책무구조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금융사고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무구조도는 금융회사 각 임원이 담당하는 직책별로 책무를 배분한 내역을 기재한 문서다. 임원 개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내부통제 대상 업무의 범위와 내용을 금융회사 스스로 특성을 고려해 사전에 명확히 하는 것이다. 금융권 내부통제 강화를 위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작년 7월부터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도 시작됐다.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담당 임원들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어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은행에서는 이 법이 시작된 지난해 7월 이후에도 금융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이 지난 9일 공시한 내용을 보면 작년 2월29일부터 올해 1월21일까지 46억원 규모의 업무상 배임 사고가 발생했다. 일부 직원이 허위 부동산 담보를 통해 임의 대출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측은 관련 직원을 인사 조처하고 형사고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 사고가 KB국민은행이 책무구조도를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이후에도 이어졌기 때문에 내부통제에 책임이 있는 관련 임원들까지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금감원은 현재 이 사고와 관련해 검사를 진행 중이다.


하나은행이 지난달 23일 공시한 내용을 보면 일부 임직원이 2021년 10월부터 작년 12월까지 74억원 규모의 부당대출, 사적금전대차, 금품수수 등의 비위행위를 저질렀다. 이 직원 역시 형사 고소될 예정이다. 기업은행에서 올해 공시한 2건의 업무상 배임 및 사기 등의 금융사고 역시 2022년 6월부터 작년 11월까지 비위행위가 이어졌다. 모두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에도 진행된 사고인 것이다.


책무구조도가 도입됐음에도 사고가 이어지자 은행들은 내부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신고 포상금을 올리는 등 내부통제 강화를 지속 중이다. KB국민은행은 올해 1월부터 책무 관리를 전담하는 고객관계전문역(RM)을 두고 금융사고 예방에 힘쓰고 있다. 신한은행의 경우 내부 비리에 대한 고발 포상금을 기존 5억원에서 20억원으로 올렸다. 하나은행은 준법감시 인력 비율을 크게 늘렸다. 올해 금융사고 공시가 없었던 우리은행은 내부통제 전문가를 대규모 투입해 대대적인 점검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책무구조도 도입 이후 금융사고 예방을 위해 자체적인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며 "최근 금융사고 공시가 많아진 것도 자체적인 모니터링이 강화되면서 적발 건수가 늘어난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춰서 사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금융사고도 있다"고 언급했다.


책무구조도 도입 앞둔 증권사, 보험사도 실효성 우려
책무구조도의 실효성 우려는 오는 7월부터 도입이 예정된 금융투자업계나 보험업계에서도 나온다. 책무구조도는 구조상 최고경영자(CEO)까지 내부통제 책임이 부여되는데 증권사나 보험사의 경우 은행과 달리 CEO가 아닌 대주주가 실질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 이들의 책임 여부가 모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주주들이 실질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미등기 임원으로 물러나거나, 책무구조도상 책임을 지울 CEO를 따로 선임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대주주들이 CEO 역할을 겸임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중소형 증권사의 경우 책무구조도 도입을 앞두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개편하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증권사나 보험사도 은행 못지않게 금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책임 회피만 늘고 실제 사고는 줄지 않으면 제도 도입 초기부터 실효성 우려가 불거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책무구조도가 중대재해처벌법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건설 현장 등에서 발생하는 인명사고를 막기 위해 2022년 도입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시행된 지 수년이 지난 현재 처벌 대상은 늘어났지만 사고는 줄지 않고 있어 제도를 다시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책무구조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제재보다는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제도를 안착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태록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금융기관의 내부통제 문제가 반복된 배경에는 금융사고 발생에 따른 기대손실보다 예방에 드는 비용이 더 크다고 생각한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책무구조도 도입이 제재보다 예방에 더욱 방점을 두기 위해서는 전사적 내부통제 비용을 가늠하고 이를 토대로 기관별로 갖춰야 할 내부통제의 합리적 수준을 판단해 나갈 필요가 있다"며 "예컨대 감독당국은 위험요인 인식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통일적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내부통제 관리 및 이행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기관별로 차별화된 기준을 적용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금감원도 여러 가지 우려를 감안해 은행과 증권사, 보험사 등 책무구조도 도입 회사를 대상으로 컨설팅을 진행하고 피드백을 제공하는 등 제도 안착에 힘을 쏟고 있다. 과도한 제재에 대한 우려를 방지하기 위해 중대성사전검토위원회도 설치하기로 했다. 위원회에 금감원 옴부즈만 위원들을 포함시켜 제재의 공정성을 높일 계획이다. 시범운영 기간 중에는 내부통제 관리의무가 미흡한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등 인센티브도 제공하는 중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책무구조도 컨설팅을 통해 나타나는 쟁점과 미비점 등에 대해서는 업계 설명회 등을 통해 안내하고, 앞으로도 금융권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새로운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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