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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작가 "북한 남성 쌀 1㎏ 벌 때, 장마당 여성은 50㎏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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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작가 "북한 남성 쌀 1㎏ 벌 때, 장마당 여성은 50㎏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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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송아, 에세이 '여자는 죽지 않았다'
북한 사업가 출신으로 2011년 탈북
여성 경제력 신장으로 이혼율 높아져


책 '여자는 죽지 않았다'를 쓴 설송아 작가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북한 페미니즘으로 사회 변화를 조명하다'는 주제로 쓴 원고가 지난해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콘텐츠 창작지원 공모에 선정되면서 출간됐다. 원래 본인이 달았던 책 제목은 '페미니즘, 사회주의 흔들다'다. 남동균 인턴기자

책 '여자는 죽지 않았다'를 쓴 설송아 작가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북한 페미니즘으로 사회 변화를 조명하다'는 주제로 쓴 원고가 지난해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콘텐츠 창작지원 공모에 선정되면서 출간됐다. 원래 본인이 달았던 책 제목은 '페미니즘, 사회주의 흔들다'다. 남동균 인턴기자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처음 읽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북한학 연구자이자 탈북 작가인 설송아(본명 최설·56)씨는 마흔 살이 넘어 처음 들어 본 단어, '페미니스트'를 찾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맨손으로 창업해 장마당을 일구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북한의 여성, 벌이와 가사와 양육을 모두 책임지는 동시에 남편을 부양하는 모순의 출구를 찾고자 고민하던 나의 친구들, 모두가 북한의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 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설씨의 첫 에세이인 '여자는 죽지 않았다'는 북한 사회를 여성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여성 사업가였던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기반으로 했다. 최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설씨는 "한국에선 북한이 굶어 죽고, 주눅 들어 사는 곳으로만 그려지는데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라며 "나를 드러낸 에세이로 북한 사람의 생활과 생각을 정확히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북한 페미니즘, 사회주의 흔들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 11년 만에 개최된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서 참가자와 악수하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 11년 만에 개최된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서 참가자와 악수하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도 저출생 문제가 심각하다. 이혼율도 급증하고 있다.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가정 붕괴 징후는 곳곳에서 목도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3년 어머니대회 때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을 국가 영웅으로 칭호했다. 설씨는 "북한에서도 비혼 여성이 늘고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며 "이혼도 뇌물을 주면서까지 정말 많이 해 이제는 이혼을 신청한 사람뿐 아니라 부부 둘 다 감옥에 간다"고 전했다.

높은 이혼율 배경엔 북한 여성의 경제력 신장이 있다. 1990년대 국가 식량배급제가 무너지고 장마당이 허용되면서,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시작한 여성이 공장 임금 노동자인 남성의 경제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두 수령(김정은, 남편)을 모셔야 한다"고 세뇌당하는 가부장제에서 갑갑함을 느꼈던 많은 여성이 경제권을 쥐자, 이혼을 선택했다. 설씨는 "김 위원장이 얼마 전 공장 노동자 임금을 20배 올렸는데도, 남성의 공장 월급으로는 쌀 1㎏도 사기 힘들지만 여성은 장마당에서 쌀 50㎏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서 저출산 문제를 주제로 하는 리일환 당비서의 대회보고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서 저출산 문제를 주제로 하는 리일환 당비서의 대회보고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책은 북한 여성 사업가의 시장 경제 체험기이기도 하다. 설씨도 장마당에서 자본주의 시장 원리를 깨쳤다. "북한에서 장마당 대학을 나왔다"고 할 정도다. 그는 평양에서만 구할 수 있는 사탕을 고향인 평안남도 순천에 가져가 약으로 교환한 뒤, 이를 다시 평양 장마당에서 팔며 장사를 시작했다. 빵 공장을 운영하면서는 공장 노동자가 10년 벌어야 손에 쥐는 월급을 하루 만에 벌었다.


탈북도 사업을 더 키우려다 하게 됐다. 비자를 받고 중국에 나왔다가 투자가 연달아 엎어지자 2011년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는 "정주영 회장처럼 한국서 돈을 많이 벌어 고향에 돌아가면 환영받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했다.

'진짜 북한'을 기록하는 사람



설송아 작가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자신의 첫 에세이 '여자는 죽지 않았다'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의 지역경제와 시장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북한학 연구자이자 앞서 '태양을 훔친 여자'라는 소설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남동균 인턴기자

설송아 작가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자신의 첫 에세이 '여자는 죽지 않았다'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의 지역경제와 시장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북한학 연구자이자 앞서 '태양을 훔친 여자'라는 소설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남동균 인턴기자


한국 생활 15년 차. 한국에서 북한 여성으로 사는 건 더 힘들다. 설씨는 종종 "'북한 출신 여성'으로서 짜놓은 구도대로 말하기를 종용하는 암묵적 요구"가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 여성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시선에 '가난한 데서 왔으니까 말 잘 듣고, 순종해야 돼'와 같은 식민지성, 가부장제가 내재돼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 책은 북한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는 시도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북한 여성을 '미녀 응원단'으로 인식한다. 그는 "북한 여성도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며 담차게 살고 있다"며 "계속 북한 사회에 대한 책을 쓰면서 한 명의 기록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