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MHN스포츠 언론사 이미지

민주화 운동가에서 보수 정치의 중심으로, 인간 김문수의 여정을 돌아보다

MHN스포츠 이건희 인턴기자
원문보기

민주화 운동가에서 보수 정치의 중심으로, 인간 김문수의 여정을 돌아보다

서울구름많음 / 28.0 °

(MHN 이건희 인턴기자) 민주화 운동의 전설이자 노동자의 대변인이었던 김문수, 이제는 보수 정치의 중심에 선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여정을 따라가 보려한다.

3선 개헌 반대에서 민청학련까지, 뜨거웠던 청년기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1951년 9월 2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경주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 속에서도 학업에 매진한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며 자랐고, 영천국민학교와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9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그의 학생운동에 대한 열정은 계속됐다.

그가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된 계기는 서울대 동아리 회원 모집 연설이었다.


당시 "대학에 출세하러 왔느냐"며 사회적 불의를 지적한 연설에 깊은 영감을 받은 김문수 후보는 후진국 사회 연구회에 가입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전국학생시위에 참여하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첫 번째 제적을 당했고,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현장 중심의 활동을 이어갔다.

1973년 10월 복학했지만, 1974년 전국민주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며 다시 제적되었다.


두 차례의 제적과 수차례의 구속에도 그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민주화와 노동자 권익 보호에 대한 신념을 더욱 강하게 다졌다.


노동운동가로서의 투신과 두 차례 수감

1970년대 김문수 후보는 학생운동에 이어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위장 취업' 1세대로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재단 보조로 일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한일도루코 보일러공으로 활동하며 노조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두 차례 수감되었으며, 특히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강도 높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동지'들의 소재를 실토하지 않은 일화는 그의 강직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고 평가했다.

김문수 후보는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많은 운동권 청년들에게 '전설'로 불렸다.

정치 입문과 민중당 창당

김문수 후보의 정치 입문은 진보 진영에서 시작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 세력의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그는 이재오, 장기표, 이우재와 함께 1990년 '민중당'을 창당했다.

김 후보는 구로구 갑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이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하며 해산됐고, 김 후보 역시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보수 정당 내 개혁파로의 성장민중당 해산 이후 김문수 후보는 1년간 택시기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그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보수 진영으로 전격 합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 세력을 대거 영입했고, 김문수와 이재오는 대표적인 영입 인사로 꼽힌다.

1996년 김 후보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부천 소사에서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16대, 17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며 3선 의원으로 활약했고, 한나라당 내 개혁 성향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그는 당내에서 강경 보수 세력과 대립하며 개혁 보수의 목소리를 내왔고, 특히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으로서 혁신 공천을 주도하며 주목을 받았다.

김 후보는 단순한 보수 정치인이 아니라,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적 성향을 띠며 당의 변화와 혁신을 강조해왔다.

이러한 정치적 노선은 이후 경기도지사로 이어지며 그의 정책적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치적 성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2006년 김문수 후보는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그의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았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굵직한 경제적 성과를 남겼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기획을 최초로 추진했고,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 유치 등 대형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또한, 수도권 통합환승할인제를 도입해 대중교통의 편의성을 높이고, 교통비 절감을 실현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성과는 김 후보가 지역 경제 활성화와 실질적인 정책 실행에 집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기도지사로서 그는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정치 철학을 기반으로 실천 중심의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무한돌봄 사업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가정을 지원했고, 광역버스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는 등 시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굴곡 속에서 다져진 소신과 도전

김문수 후보의 정치 여정은 성공만큼이나 굴곡도 많았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했으나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았다.

특히 수성구 갑은 보수 정당의 텃밭으로 불리던 지역이었기에 그의 낙선은 정치적 타격이 더욱 컸다.

이후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도전했지만, 박원순 후보에게 밀리며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연이은 선거 패배로 정치적 위상이 흔들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보수 진영의 중심으로 떠오른 계기는 12·3 비상계엄 국면이었다.

계엄 선포에 대한 여야 간 논란 속에서 김문수 후보는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며 소신 있는 발언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당내 강경파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일관된 정치적 신념은 보수 지지층의 마음을 다시 끌어당겼다.

2025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그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당내 갈등을 조율했으며, 한덕수 전 총리와의 최종 경선에서 56.5%의 득표율로 승리해 대선 후보 자리를 얻어냈다.

그의 정치적 재기는 단순한 운이 아니라 소신과 원칙에 기반한 정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험이 담긴 공약, 실천하는 정치

김문수 후보는 대선 후보로서 노동 생산성 향상과 근로자·기업의 상생을 핵심 비전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노동시간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고, 직업 전환 교육을 강화해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대학교육 혁신을 통해 미래산업에 맞춘 인재를 양성하고, AI 3대 강국 도약을 목표로 권역별 AI 융합지원센터를 설립해 첨단 기술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GTX 전국 확장을 포함한 대규모 교통망 혁신을 통해 지방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방주도 균형발전을 추진하여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공약도 제시했다.

김 후보가 제시한 정책들은 그가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마련된 구상들이다.

'땀 흘리는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의 오랜 소신은, 이번 대선 공약 곳곳에 녹아 있다.

김문수 후보는 '말이 아닌 실천'을 강조하며, 자신의 인생을 통해 증명한 약속 이행의 철학을 다시 한 번 국민 앞에 펼칠 준비를 마쳤다.

사진=연합뉴스

<저작권자 Copyright ⓒ MHN / 엠에이치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