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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5주년 특집> 다시 보는 5공 청문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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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5주년 특집> 다시 보는 5공 청문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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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서울에서 벌어진, 한밤의 괴담 같았던 윤석열의 내란과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의 내란. 포고령에 ‘국회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담은 두 번의 불법 계엄은 4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반민주, 반헌법 세력들의 권력 연장 야욕은 시간이 지나 또 다시 반복됐습니다. 탄핵은 파괴된 민주주의 회복의 시작일 뿐이며, 아직 내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끊어 낼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뉴스타파가 1980년 광주학살의 역사를 거울삼아 윤석열의 내란을 다시 들여다 보는 이유입니다.

- 편집자 주 -

형식만 갖춘 ‘간담회’ 수준의 국무회의

1980년 5월 17일, 국무회의는 8분 만에 전국 계엄 확대를 결정했다. 1988년 12월 20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 위원회’(광주특위) 20차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은 “설명도 없이 서명하게 됐다”고 말했다. 1988년 12월 6일 광주특위 15차에 출석한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도 “복도에 무장 군인이 있어 불쾌했다”며 당시 국무회의 분위기가 비정상적이었다고 증언했다.


▲ 5·18광주특위 15차 회의에서 증언하고 있는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 방송 화면 캡처 (1988년 12월 6일)
2024년 12월 3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실로 오라는 통보만 받고 모인 국무위원들은 어떤 회의가 열리는지조차 몰랐다. 마지막 위원이 도착한 지 5분 만에 윤석열은 회의장을 떠났고, 국무회의 요건인 회의록도, 부서도 없이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간담회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국무회의 당시 윤석열에게서 ‘쪽지 문건’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그 내용을 읽지 않았다고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내란 국정조사특위)’에 출석해 증언했다. 해당 쪽지에는 ‘비상입법기구 관련 예산 마련, 예비비 확보 등’의 지시가 담겨 있었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를 우회하는 입법기구 설립 구상이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연상케 한다”고 비판했다.

국회 봉쇄와 ‘담 넘은 의원들’

1980년 5월 신군부는 국회의사당을 장갑차로 봉쇄했고, 야당 의원들을 연행했다.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은 “국회가 국가 혼란의 중심이라는 인식이 군 내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2024년 12월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경찰은 국회 정문을 봉쇄했고, 의원과 취재진의 출입을 통제했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은 담을 넘어 국회에 들어갔다. 곽종근 당시 특전사령관은 내란 국정조사특위에 출석해 “대통령께서 비화폰으로 제게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다. ‘의결정족수가 아직 다 안채워진 것 같다. 빨리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끄집어내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김봉식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계엄사령부의 계엄 선포 직후 국회 주변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고 출입을 통제했지만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을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일시 출입 해제 후 다시 전면 통제 이유가 포고령 1항 때문이 아니냐는 국회 대리인단의 질문에는 “포고령 1항의 근거에 의해서 상급청의 지시에 따라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답했다.


▲ 5·18광주특위 8차 회의에서 박찬종 의원이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을 신문하는 장면 방송 화면 캡처 (1988년 11월 19일)

‘북한 위협’과 ‘반국가세력’, 똑같은 명분

전두환 정권이 내세운 계엄의 명분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었다. 윤석열은 “북한과 반국가세력이 여론 조작과 선전 선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의 “이번 계엄은 무력 억압이 아니라 대국민 호소였다”는 주장은 1980년 광주에서 전두환이 내세운 “국가 안정” 논리와 다르지 않다.

1980년 5월 17일 밤, 계엄 선포 직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택에서 체포됐다. 김영삼은 가택 연금, 김종필은 연행 후 석방됐다. 김대중은 “보안사 간부가 ‘살고 싶으면 대통령을 단념하라’고 회유했다”고 증언했다.


2024년에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계엄군이 진입하려 했고, 생중계를 통해 그 과정이 그대로 노출됐다. 비판 언론사에 대한 단전 단수도 시도됐다. 45년 전 정적을 침묵시키기 위해 활용했던 수단을 이번에도 또 쓰고자 했다. 두 사례 모두, 실체 없는 공포를 이유로 국회가 침탈됐고, 언론 통제가 시도됐으며, 이를 위해 특수부대가 동원됐다.

헌법과 민주주의 유린하고도 무책임

1980년에도, 2024년에도 책임을 지겠다는 이는 없었다. 전두환은 “국방부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을 뿐”이라 말했다. 광주특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주요 관련자들 중에도 끝내 발포를 지시했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윤석열은 “경고성 계엄으로 계획된 것일 뿐이고, 포고령 집행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본인의 탄핵 심판에 출석해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시를 했니 지시를 받았니 이런 얘기들이 마치 어떤 호수 위에 떠 있는 달 그림자 같은 것을 좇아 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1980년 계엄 선포 당시의 국무총리였던 신현확은 광주특위에서 이해찬 위원이 “국회 기능 정지에 대해 국무총리가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재차 묻자 “몰랐는 것이 죄가 된다면 그것은 죄의 책임을 지겠다”고 답했다. 윤석열은 곽 전 특전사령관이 증언한 “의원들을 끄집어내라”라고 했다는 증언을 부인하며 자신은 “사람에게 의원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라고 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자신에게 직접 체포 지시를 받아 수행했다는 부하 면전에서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1980년 광주에서도, 2024년 서울에서도 결국 계엄을 책임지겠다는 명령자는 없었다. 쏜 자도, 쏘라 한 자도 없다는 말만 반복됐다. 책임은 없고, 피해자만 있다.


▲ 5·18광주특위 28차 회의에서 증언하고 있는 김현녀 씨 방송 화면 캡처 (1989년 2월 22일)

복종 대신 헌법을 선택한 군인, 그리고 시민

1988·9년 광주특위는 끝내 발포 명령자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은 1987년 헌법에 ‘군의 정치적 중립’ 조항을 새겼다. ‘12·3 내란’에서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군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2024년 특전사 장교와 경비단 지휘관 등 일부 군인들은 출동 중단을 지시하며 작전을 철수시켰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증언하며 “항명죄를 각오했다”고 말했다.


▲ 8차 탄핵심판 변론에서 증언하고 있는 조성현 당시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 영상 화면 캡처 (2025년 2월 13일)
1980년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섰고, 결국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2024년, 국회를 포위한 군과 경찰 앞에서도 시민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은 8년이 지난 후에야 텔레비전에 방송될 수 있었지만 서울의 밤은 방송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시간 생중계됐다.

미완의 역사로 남은 1988·9년 5공 청문회의 기록들은 ‘윤석열 내란’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안게 된 우리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정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물음과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뉴스타파 연다혜 dahye@newstap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