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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원에 사 100만 원에 리셀' 한우 정액…당국은 뒷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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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원에 사 100만 원에 리셀' 한우 정액…당국은 뒷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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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한우 정액, 매달 인터넷 추첨 공급
3000~1만 원에 구입해 수십 배 웃돈 거래
한우개량사업소 "조사 권한·책임 없어"
"당첨 정액 사용 여부 점검 시스템 갖춰야"


한우 정액 중고거래 게시글. 네이버 카페 캡처

한우 정액 중고거래 게시글. 네이버 카페 캡처


"1만 원에 사서 100만 원에 파는 사람도 있어요. 그냥 투기판이라니까."

한우 100여 마리를 키우는 A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암소 교배를 위해 한우개량사업소에 씨수소 정액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최근 온라인 중고거래를 통해 정가의 40배가 넘는 웃돈을 주고 정액을 구했다. A씨는 "인기 있는 정액은 일부러 몇 년씩 묵혔다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파는 전문 유통업자도 있다"며 "한우 종자 개량 사업이 아니라 투기판이 된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우수 한우 생산을 위해 정부가 보증하는 씨수소 정액을 둘러싸고 웃돈 거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액 공급을 담당하는 농협 한우개량사업소는 '당첨 후 농가로 소유권이 넘어간 이상 재판매는 개인의 문제'라며 손을 놓고 있어 사실상 투기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온다.

15일 네이버 중고나라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 온라인 거래 사이트에서 '한우 정액'을 검색하자 게시 글 수백 건이 쏟아졌다. 개당 10만~50만 원에 판매하거나 각 종별 씨수소 정액 100여 개를 3,500만 원에 일괄 처분한다는 내용이었다. 유통기한이 없다 보니 10년 전 도축된 KPN950을 매물로 올린 글도 있었다. KPN은 한우능력검정 결과에 따라 선발된 씨수소에 부여되는 고유번호다.

500명이 넘는 회원을 둔 한우 정액 거래 오픈톡. 카카오톡 캡처

500명이 넘는 회원을 둔 한우 정액 거래 오픈톡. 카카오톡 캡처


국내에 유통되는 한우 정액의 98%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위탁받은 한우개량사업소에서 공급한다. 개인 농가도 허가를 받으면 정액을 생산‧판매할 수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요건이 까다로워 선호하지 않는다. 사업소는 보증씨수소 100마리를 관리하며 연간 정액 200만 개 정도를 생산한다. 생산된 정액은 매달 1~16일 인터넷 등으로 접수한 뒤 추첨을 통해 사육두수별로 차등 공급한다. 13개월령 이상 암소 2마리만 있으면 신청할 수 있다. 가격은 3개 그룹으로 나눠 개당 3,000원, 5,000원, 1만 원이다.

그러나 사업소 손을 떠나면 정액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도체중(도축 후 실제 유통·판매 가능한 고기 무게), 등심단면적, 근내지방도 등 후대성적이 뛰어난 씨수소 정액에는 수백 명의 신청자가 몰리다 보니 웃돈 거래와 불법 매집이 성행한다. 울산 울주군에서 소를 키우는 한 농가는 "101두 이상을 키우면 한 번에 30개씩 당첨되는데, 개당 만 원씩 30만 원을 주고 받아와 천만 원에 되판다"며 "발정 시기를 놓치면 송아지 생산성이 떨어지고, 씨수소 유전능력에 따라 송아지 가격이 백만 원 이상 차이가 나니 웃돈을 주고라도 우수 정액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전국에서 한우 사육두수가 가장 많은 경북 경주시의 한 농가는 "로또나 마찬가지"라며 "번식을 하지 않는 비육우 농장까지 달려들어 정액을 신청한 뒤 당첨되면 재판매 하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중고거래 장터에 올라온 한우 정액 판매 인증 사진. 독자 제공

중고거래 장터에 올라온 한우 정액 판매 인증 사진. 독자 제공


한우개량사업소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대처는 미온적이다. 정액의 소유권과 처분권은 농가에 있고 개인 간 거래를 제재할 법적 근거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우개량사업소 관계자는 "실제 정액을 사용했는지 조사할 권한도, 책임도 없다"며 "웃돈 거래가 도의적인 부분에서 부적절하지만 법적으로 제재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번식우 농가들은 수태율이나 혈통 정보 등 이력제를 활용해 당첨 정액을 사용하지 않은 농가에는 신청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우협회 관계자는 "이력제 정보만 확인해도 비육우 농가인지 번식우 농가인지, 송아지는 태어났는지, 태어났으면 어떤 정액을 썼는지 등을 알 수 있다"며 "최소한 공급 정액의 사용 여부 정도는 확인해 실수요자에게 필요한 정액이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경주= 박은경 기자 chang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