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재의 1인 2역으로 빚어내는 오묘한 삼각 로맨스는 티격태격 코미디를 동반하지만, 감정을 곱씹을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한편 인간의 몸을 얻음으로써, 오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는 설정은 몸철학에 기초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곰곰이 음미할 만하다.
‘귀궁’ 5회. 무녀 여리가 이무기 강철을 몸주신으로 모시겠다는 언약식을 맺는 장면. 강철이 여리에게 옥가락지를 끼워주는 모습이 마치 결혼식을 연상시킨다. 여리에게 강철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입은, 가장 혐오하는 자이다. 에스비에스 제공 |
드라마 ‘귀궁’은 오컬트 로맨스 사극이다. 첫 회부터 시청률이 9%를 찍었다. 이무기와 무녀의 로맨스라는 참신한 설정과 육성재, 김지연, 김지훈의 호연이 시청자를 강하게 흡입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외다리귀신, 물귀신, 팔척귀 등 새로운 귀신의 등장과 밝혀지는 악연이 흥미를 더한다. 드라마는 오컬트를 표방하나 과하게 무섭지 않고, 몸이 바뀐 채 빚어지는 아이러니한 관계성이 로맨스에 깊이를 더한다. 궁중 암투와 액션도 간이 딱 맞으며, 장르를 버무리는 솜씨가 예술이다.
‘귀궁’ 6회. 무녀 여리가 악몽에 시달리는 중전의 베개 속에서 해골을 찾아낸 장면. 왕실에 원한을 품은 팔척귀가 중전의 복중 태아를 노리고, 중전을 괴롭힌다. 여리는 상의원의 애체 장인으로 궁에 들어와 왕의 곁에서 수사를 돕는다. 에스비에스 제공 |
궁중 주술 사극에 무당 영웅의 빌드업
유학을 건국 이념으로 삼고 무속을 인정하지 않았던 조선의 궐내에서, 무녀(김지연)와 이무기(육성재)와 왕(김지훈)이 귀신과 사투를 벌이다니, 신선한 그림이다. 그동안 궁중 사극에서 정적을 저주하는 음사를 행하는 장면이야 흔했지만, 궐내에 버젓이 귀신이 날뛰고, 궐 안에서 귀신을 쫓는 주술을 벌이는 사극은 드물었다. 심지어 이 모든 행위가 왕과 함께 이루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인공이 영웅적인 무녀다. 인간의 몸을 입은 이무기가 무녀와 복잡다단한 사랑을 한다. 왕은 개혁을 꿈꾸는 로맨티시스트고, 귀신은 선대로부터 왕실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드라마 ‘야경꾼 일지’와 ‘조선구마사’ 포스터. ‘야경꾼 일지’는 귀신 보는 왕자, 이무기, 무녀 등이 등장하는 사극으로, 한국 판타지 사극의 새 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구마사’는 역사 왜곡 문제로 2회 만에 종영하였다. 두 드라마의 성공과 실패를 딛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잘 계승한 궁중 판타지 로맨스 사극 ‘귀궁’이 탄생할 수 있었다. 에스비에스 제공 |
이토록 낭만적인 궁중 판타지 사극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계보가 있다. 드라마 ‘야경꾼 일지’(2014)는 조선을 배경으로 아들을 살리려고 백두산 출정을 떠나는 왕, 귀신 보는 왕자, 귀신과 싸우는 야경꾼, 이무기, 백두산 마고족 무녀, 화려한 액션과 특수효과가 등장하는 판타지 로맨스 사극이었다. ‘야경꾼 일지’는 당시 시청률도 높았고, 한국 판타지 사극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중국, 태국 등으로 수출하였다. 이후 귀신은 아니지만, 조선 궁 안에 좀비나 괴물이 들끓던 영화 ‘창궐’(2018) ‘물괴’(2018), 드라마 ‘킹덤’(2019)이 만들어졌다. 사실 ‘귀궁’ 7~8회에 등장하는 수살귀의 모양과 움직임은 좀비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반드시 짚어야 할 흑역사로 드라마 ‘조선구마사’(2021)가 있다. 궁중 퇴마 사극이었는데, 높은 시청률로 출발했으나, 시청자들의 항의로 2회 만에 종영했다. 앞에 언급한 콘텐츠들이 특정 왕을 적시하지 않은 가상 역사극이었던 것과 달리 태종, 충녕대군 등 역사적인 인물을 적시한 데다, 첨예한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왔다. 특히 중국과 관련된 역사 왜곡 문제가 대중의 역린을 건드렸다. 업계 창작자들은 매서운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괴력난신을 다룬 궁중 판타지 사극은 분명히 수요가 있다. 다만 역사 왜곡 논란 없이, 오히려 한국의 전통문화를 잘 계승하여 그렸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귀궁’ 6회. 여리가 해골에서 불러낸 수살귀에게 공격을 당하는 장면. 수살귀는 생김새와 움직임이 좀비와 유사하다. 수살귀가 입에서 쏟아낸 썩은 물이 여리의 얼굴에 맞는다. 이것을 ‘살을 맞았다’고 표현한다. 에스비에스 제공 |
그러던 차에 영화 ‘파묘’(2024)가 흥행하였다. ‘파묘’의 흥행 이후, 젊은 무속인에 대한 거리감이 없어지고, 샤머니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신들린 연애’처럼 무속인을 친근하게 그린 예능 프로그램이 지상파에 등장하였다. 이제 무당을 신비하고 기이한 조력자가 아닌, ‘영이 맑고 그릇이 큰 영웅’이자 주인공으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즉 무녀를 주인공 삼아, 여성 영웅담이자 판타지 로맨스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귀궁’의 작가 윤수정은 ‘만신’,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등 무속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김금화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 등을 통해 무속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였다고 털어놓는다.
‘귀궁’ 4회. 여리가 다친 강철을 간호하는 장면. 윤갑의 몸을 입은 이무기 강철은 윤갑을 질투하며, 인간의 오감으로 여리에 대한 사랑을 강렬히 느끼고 있다. 여리는 윤갑을 그리워하며 강철에게 점점 이끌린다. 육성재의 1인 2역으로 빚은 오묘한 삼각 로맨스다. 에스비에스 제공 |
이무기와 무당의 ‘혐관’ 로맨스
‘귀궁’의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당 여리와 이무기 강철의 관계성이다. 이무기 강철은 용이 되고 싶어 자신을 몸주신으로 모셔줄 무당으로 여리를 점찍고 13년 동안 쫓아다녔다. 강철이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는 바람에, 여리는 불행의 아이콘이 되어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할머니 무당 넙덕의 죽음도 강철의 짓이라 생각한 여리는 강철을 몸주신으로 모시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여리의 첫사랑 윤갑이 칼을 맞아 죽어가는 사이 윤갑의 몸에 강철이 빙의한다. 윤갑의 혼은 팔척귀에 붙들려 사라진다. 여리는 윤갑의 혼을 찾아 윤갑의 몸에 돌려놓기 위하여 (즉 윤갑을 살려내기 위해) 강철과 힘을 합치려 한다. 그래서 강철을 몸주신으로 받아들이는 언약식을 행한다. 흡사 언약식이 결혼식 같아 보인다. 그런데 둘의 감정이 복잡하다. 여리의 입장에서 강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윤갑의 몸에 내가 가장 증오하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강철의 입장에서 여리는 13년 동안 쫓아다녀도 절대로 나를 모시지 않겠다더니, 윤갑을 살리기 위해선 단숨에 마음을 돌리다니 허무하다. 강철이 처음으로 인간의 몸을 갖고 보니, 오감이 살아나서 여리를 향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겠고, 사랑의 감정도 또렷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몸의 반응이 윤갑의 반응인지, 나의 반응인지 모르겠다. 나를 보고 웃는 여리가 윤갑에 대한 웃음인지 나에 대한 웃음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몸에 갇혀 있자니 이무기의 힘이 점점 약해져, 팔척귀를 무찌르겠다는 여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려면 윤갑의 몸을 죽이면 되는데, 여리를 사랑하기에 윤갑의 몸을 해칠 수 없다. 사실 13년 전 여리의 할머니 넙덕을 죽인 것은 강철이 아니었다. 강철은 여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여리의 지독한 증오를 견뎌왔다. 여리가 알면 안 되는 무서운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여리를 향한 강철의 마음이 처음엔 그저 스토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굉장한 순애보이다. 강철은 자신도 여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결국 야광주를 소진하는 희생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육성재의 1인 2역으로 빚어내는 오묘한 삼각 로맨스는 티격태격 코미디를 동반하지만, 감정을 곱씹을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한편 인간의 몸을 얻음으로써, 오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는 설정은 몸철학에 기초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곰곰이 음미할 만하다.
‘귀궁’ 2회. 강철이 윤갑의 몸을 얻은 후, 이무기일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오감을 얻게 되어 황홀경에 빠진 장면. 미음만 먹어도 너무나 맛있고, 온돌방에 누워만 있어도 쾌감이 넘친다. 이무기일 때의 사랑과, 인간이 된 후의 사랑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납득시킨다. 에스비에스 제공 |
한국 민속학과 샤머니즘
‘귀궁’은 글로벌 오티티(OTT) 시장에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일본,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에서 인기가 높다. 원래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콘텐츠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토속적인 민담과 신화는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계승해야 할 문화자원인 셈이다.
그동안 한국 민담이나 민속학에 대하여 ‘신과 함께’ ‘도깨비’ ‘호텔 델루나’ ‘구미호뎐’ ‘조명가게’ ‘악귀’ 등에서 꾸준한 조명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관심이 ‘귀궁’을 만드는 데 바탕이 되었다. 이무기, 빙의, 삼도천, 49재, 야광귀, 생령, 염매, 천도 등의 개념이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세계관은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에 뿌리를 둔 것이며, ‘어우야담’ ‘대동야승’ ‘천예록’ ‘연려실기술’ ‘조선왕조실록’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참고한 것이기도 하다. 느슨하게는 총 670편에 이르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재현도 참고 자료로 꼽을 수 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전국의 신화, 전설, 민요, 무가, 만가, 풍습을 채록하는 국가사업이 수행되어 ‘한국구비문학대계’가 편찬되었다. 이후 2008년에서 2018년까지 2차 채록 작업으로 자료가 보강되었다. 귀중한 콘텐츠의 원천으로, 현재 인터넷에서 누구나 검색할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을 것이 있다. ‘귀궁’에서 무녀 넙덕과 여리의 모습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무당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훨씬 공동체에 밀착되어 있으며, 공동체의 수호자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공인처럼 보인다. ‘일본에는 요괴가 많구나’ 혹은 ‘제주에는 무당이 많구나’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본래 전통사회에서는 마을마다 수호신이 있고, 무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 공동체에서 마을굿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정신 상담을 해왔다. 예인처럼 평생 제의를 익혀, 절제된 형식의 의례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섬이나 몇몇 해안 마을을 제외하고 이들이 거의 사라졌다. 일제의 탄압, 기독교의 전파,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등을 거치면서 이들의 대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후 샤머니즘은 마을 공동체와 연결이 없는 무당들의 개인사업으로 변질하였다. 현재 전국의 무속인은 30만명을 헤아린다. 지난겨울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내란에 무속인이 관여했다는 초현실적인 뉴스를 접하고,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내란 귀신을 쫓는 마음으로 거리를 밝힌 이들이 많았다. 궐 안이 온통 원귀로 들끓더라도, 두려움 없이 퇴마하고 천도하는 담대한 여성 영웅의 드라마가 세계인을 매혹한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케이(K)-콘텐츠이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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