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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고 스승의날은 교사도 환경실무원도 ‘머리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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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고 스승의날은 교사도 환경실무원도 ‘머리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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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 미용봉사 동아리, 15년째 염색·커트·마사지 ‘전통’
영양교사·조리사 등 구성원 누구나 가능…“특별한 선물 같아”
흰 가운을 두른 박원자씨(59)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풀었다. “귀밑으로 요 정도만 해주세요.” 가위를 잡고 커트를 준비 중인 이윤아양(18)에게 부탁했다. 환경실무원 박씨는 지난 3월부터 병천고에서 일하고 있다. 커트를 받기 전에는 이규현군(17)에게 어깨 마사지를 받았다. 이군은 반려동물, 박씨의 자녀 이야기, 인생사를 두루 물으며 능숙하게 ‘스몰토크’를 나눴다. 박씨는 “학생들이 저를 불러줘 감동했다”며 살짝 눈물을 보였다.

스승의날을 하루 앞둔 14일 충남 천안시 병천고 미용봉사 동아리 학생 16명은 작은 행사를 준비했다. 학교 구성원 누구나 새치 염색, 커트, 핸드마사지를 신청할 수 있었다. 보통 스승의날 행사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진행되지만 병천고는 다르다. 교육공무직인 환경실무원, 교무행정실무사 등 학교 구성원 모두가 미용봉사 동아리의 초대장을 받았다.

병천고는 전교생 419명인 공립 특성화고다. 조리·미용과 학생이 반씩 있다. 미용과 학생들이 15년째 스승의날마다 모든 학교 구성원을 초대하는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지도교사 주강진씨는 “미용봉사 동아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꾸리고 준비한다”고 했다.

25년차 행정실무사 허선욱씨(58)는 스승의날 때마다 새치 염색을 받았다. “직접 받아보면 학생들이 진짜 프로처럼 잘해주더라고요.” 허씨는 이날은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치며 손·어깨 마사지만 받았다. 허씨는 “재학증명서 뗄 때 빼고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라 매해 기대된다”고 했다.

보건교사, 영양교사, 특수교사도 이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용 실습실을 찾았다. 평소 미용과 학생들과 접점이 많지 않은 교사들이어서 “흔치 않은 고마운 시간”이라고 했다. 특수교사 김은경씨(49)는 “특수학급이 아닌 학생과 마주치고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25년차 보건교사 장희자씨(60)는 “학생들과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특별한 선물 같다”고 했다.

7년차 최수경 영양교사(33)는 손톱 손질을 받으며 학생들과 자신의 진로 선택 과정을 공유했다. 학생들이 “마스크 벗고 사복 입으니 달라보여요, 쌤”이라고 하자 최 교사는 머쓱해했다. 최 교사는 “서비스직을 준비해서인지 미용과 학생들은 늘 조리실무사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밥이 맛있다는 표현을 한다”며 “조리과 학생들은 조리실무사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더 감사함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저도 늘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조리실무사 8명, 조리사 1명은 점심식사 준비로 이날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대신 쿠키와 음료, 자외선차단제가 담긴 꾸러미를 전달했다. 미용과 최다혜양(17)은 “조리실무사분들이 학생들마다 좋아하는 반찬이나 싫어하는 국을 알고 더 주거나 일부러 빼주기도 하신다”며 “하루 세끼를 먹는 기숙사 생활하는 친구들의 이름은 외우고 있는 분도 많다”고 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학교 안 모든 구성원과 관계맺기에 적극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면서 20년 넘게 일했던 환경실무원 사례를 소개했다. 학생들은 지난해 퇴직한 환경실무원과 오며 가며 인사를 하다 두 달에 한 번씩 커트와 파마를 해드렸다고 한다. 환경실무원은 학생들이 거절하는데도 종종 1만~2만원씩 주머니에 용돈을 넣어줬다고 한다. 변영우 병천고 교장(61)은 “학교 구성원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존중하는 게 하나의 전통이 된 것 같다”며 “학생들의 마음 씀씀이가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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