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보다 먼 '섬 속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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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핀 세연정[사진/백승렬 기자] |
(완도=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반도 육지부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마을에서도 배로 40여분 들어가 닿는 섬이 노화도이다.
보길도는 노화도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장사도, 보길대교를 건너야 이를 수 있다.
땅끝보다 먼, 섬 속의 섬이다. 보길도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가 20년가량 은거했던 곳이다.
한글 시조의 백미로 꼽히는 '어부사시사'가 탄생한 무대이기도 하다.
고산이 1651년에 쓴 어부사시사는 어부의 생활을 봄, 여름, 가을, 겨울별로 10수씩 노래하고 있다. 모두 40수이다.
그가 1642년에 쓴 '오우가'와 함께 중등 교과 과정에서 누구나 배울 정도로 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다.
사대부들이 한글을 천시하던 시대, 누나에게 한글을 배운 윤선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쉬운 우리말로 물 흐르듯 유연하게 노래했다.
그는 정철(1536∼1593), 박인로(1561∼1642)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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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장사도, 노화도를 연결하는 보길대교[사진/백승렬 기자] |
◇ '삼전도의 굴욕' 뒤 세상을 등지려다 만난 보길도
인조는 1637년 2월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하고 항복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해남에 있던 윤선도는 병자호란 소식을 듣고 왕자들이 피신한 강화도로 구원을 떠났으나 항복 사실을 알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부끄럽다며 은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주도로 항해하던 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을 만나게 된다.
한겨울에도 초록으로 반짝이는 난대성 상록수림, 고즈넉한 몽돌해변과 금빛 모래밭, 쪽빛 바다, 기암괴석이 신비로운 해안 절경 ….
보길도의 주산 적자산(해발 425m)의 정상인 격자봉에 오른 윤선도는 '물외가경'(세상 밖 멋진 풍경)이라며 한눈에 반했다.
윤선도는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며 보길도에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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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사진/백승렬 기자] |
그는 16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길도에서 자신의 낙원과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서재와 생활 공간을 꾸몄다.
윤선도는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그러나 보길도는 유배지가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은거지였다.
그는 보길도에 들어와서도 당쟁에 휘말려 2차례나 유배되지만 해배되면 보길도로 돌아왔으며, 85세로 숨을 거둔 곳도 보길도이다.
◇ 윤선도가 만든 낙원…낙서재와 세연정
적자산 격자봉에 오르면 다도해의 장관이 펼쳐진다.
격자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주변에 다른 높은 봉우리가 없어 맑은 날에는 제주도와 추자도까지 보인다. 제주도와 추자도는 보길도에서 각각 54㎞, 28㎞ 떨어져 있다.
격자봉에 올랐을 때 연꽃처럼 오목하고 아늑한 동네를 발견한 고산은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자신이 살 집을 지었다. 책 읽는 즐거움이 있는 집이라는 뜻의 낙서재이다.
고산의 5대손 윤위가 쓴 '보길도지'에는 이곳에 집을 지을 때 수목이 울창해 산맥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나온다.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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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보[사진/백승렬 기자] |
낙서재 옆에는 고산의 아들이 머물던 곡수당이 있다.
격자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이르러 곡수를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은 낙서재 오른쪽 골짜기에서 연못으로 흘러드는데 일삼교가 설치돼 있었다. 일삼교는 아들이 하루에 세 번 부친을 문안하기 위해 건넜던 작은 다리이다.
낙서재와 곡수당에는 붉은 동백이 만개했으며, 노란 꽃들이 막 피어나는 유채밭은 다가올 절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낙서재 맞은편 안산에는 윤선도가 부용동 제일의 명승이라고 격찬했던 동천석실이 있다. 공부방 격이었던 이곳에는 연지, 석담, 석천, 침실이 있다.
해발 100m가량의 산 중턱에 있는 석실에 음식을 나르기 위해 윤선도는 도르래를 사용했다고 한다.
우람한 바위 벼랑들이 어우러진 석실은 신선이 노니는 곳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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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사진/백승렬 기자] |
낙서재에서 약 2㎞ 떨어진 세연정은 윤선도가 지은 정자이다.
'세연'은 물에 씻은 듯 깨끗하다는 뜻이다.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연못인 세연지 안팎에는 혹약암, 사투암 등 일곱 개의 잘생긴 바위들이 보기 좋게 배치돼 있었다.
물은 바위들에 부딪히면서 흘러 스스로 정화된 뒤 회수담에 모인다.
세연지에는 전통 정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인 판석보가 있다.
세연지에 물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를 이룬다.
판석보 위로 물이 넘칠 때 세연정은 아취로 가득 찬다. 안타깝게도 이상 기후로 몇 년째 계속된 가뭄 때문에 세연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연정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 경북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한국의 3대 전통 정원으로 꼽힌다.
세연정은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는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그는 세연지의 바위들을 섬으로 여기며 뱃놀이하고 무희들에게 바위 위에서 춤추게 했다. '어부사시사'도 그때 부른 노래 중 하나였다.
◇ 자연을 사랑한 시인, 윤선도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 동산의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야 무엇 하리.
자연을 벗 삼았던 윤선도가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친구로 삼았던 시, '오우가'의 첫수이다.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한 우리 선조들의 정신과 사상이 응축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윤선도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구현한 언어의 연금술사로, 우리 고전 문학의 상징으로 각인돼 있다.
그는 또 충성스럽고 강직했던 신하이자, 정치 논객이었다. 뜻을 굽히지 않는 천성으로 인해 3번에 걸쳐 약 15년 동안 함경도 경원과 삼수, 부산 기장, 전남 광양 등에 유배를 당해야 했다.
높은 학식으로 인해 두 왕자의 스승이 되었지만, 관직에 있었던 기간보다 유배가 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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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초상화[사진/백승렬 기자] |
보길도에는 연중 탐방객이 이어진다. 현대인이 그를 동경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에 있지 싶다.
그는 관념으로만 자연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연에 파묻혀 책 읽고 시 쓰며 삶을 즐겼다.
윤선도는 해남에서 600년 이상 터를 잡고 살아온 명문가이자 거부인 해남 윤씨 집안의 16세 종손이었다.
그가 보길도 경승지에 건물 20여 동을 지어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재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남읍에는 윤선도가 효종 임금에게 하사받은 집 녹우당 등 고산윤선도유적지와 박물관이 있다.
인근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하면서 수백 권의 책을 쓴 다산 정약용이 녹우당의 장서를 빌려 참고했을 정도로 녹우당에는 국내외 희귀본이 많았다.
해남 윤씨 문중의 19세 종손인 윤두서(1668∼1715)는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풍속화의 선구자로 꼽힌다.
국보로 지정된 그의 자화상이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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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리 해안[사진/백승렬 기자] |
◇ 우암 송시열의 글씐 바위
여든셋 늙은 몸이 / 멀고 찬 바다 한 가운데 있구나 /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숙종 15년(1689)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린 뒤 83세의 나이에, 제주도에 유배됐다.
유배 가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보길도 백도리에 잠시 피신하던 중 남긴 시의 일부이다. 이 시가 새겨진 글씐바위가 해변에서 쉼 없는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조선 시대 당파 싸움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되는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남인이었던 윤선도와 대립했다.
당시 서인과 남인은 임금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어머니나 시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1차 논쟁 때 3년을 주장했던 윤선도는 1년 설을 내세운 송시열에게 패해 함경도 삼수로 생애 두 번째 유배를 가게 된다.
정적이었던 둘의 인연은 보길도에서 다시 이어진 셈이었다.
글씐바위에서 3∼4㎞ 떨어진 곳에 예송리 해수욕장이 길게 누워 있었다.
모래가 아닌 검은 천연 갯돌이 무수히 깔려 있고, 상록수림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보길도는 거리로는 해남군과 가깝고, 행정구역으로는 완도군에 속한다.
완도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꼽힌다.
오지보다 더 먼, 섬에 자신의 정원을 가꾸었던 윤선도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내 마음의 섬에 닿지 않을까.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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