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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간첩누명’ 보안사 끌려간 재일동포…함께 고문당한 친구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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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의원(왼쪽)이 군 입대 전 친구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와 찍은 사진. 한겨레는 정 의원의 친구인 양남국의 사진을 찾았지만 구하지 못했다. 정동영 의원실 제공

정동영 의원(왼쪽)이 군 입대 전 친구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와 찍은 사진. 한겨레는 정 의원의 친구인 양남국의 사진을 찾았지만 구하지 못했다. 정동영 의원실 제공


청운의 꿈을 품고 조국 땅을 밟은 재일동포 청년 양남국(1951년생)은 간첩조작사건을 노리던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현 방첩사)의 먹잇감이 됐다. 양씨와 어울렸던 정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친구들도 보안사에 끌려가 양씨에게 포섭된 게 아니냐며 지독하게 고문당했다. 이들이 사건 반세기가 지나 국가기관으로부터 과거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다. 정 의원은 “너무나 착한 친구 양남국에 대한 국가폭력 사건이 그냥 묻히지 않아 다행”이라며 “남국이가 오래 전 일본에서 실종된 상태라 안타깝다”고 말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3일 오후 열린 제109차 전체위원회에서 1975년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돼 장기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뒤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은 ‘재일동포 양남국 등 인권침해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로 보고 진실규명(피해 확인) 결정을 내렸다.



또 진실규명대상자 양씨 외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미신청 피해자 고아석·백상호·김철수씨와 군 복무 중 영장 없이 수사를 받은 정 의원에 대한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위법한 수사를 한 점에 대해 피해자 및 가족에게 공식 사과하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 후보로 출마한 5선의 정 의원이 보안사에 10일 이상 감금돼 고문 수사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양씨는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이철 대표 등이 지난 2021년 9월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1970~80년대 재일동포 인권침해 피해자 38명 중 한 명이다. 이 중 2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사람은 양씨를 포함해 5명뿐이다.



정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정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는 1975년 12월1일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재일동포 양씨를 영장 없이 연행해 같은 해 12월31일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약 31일 동안 불법구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정 의원은 약 12일, 고아석은 약 10일, 백상호는 7일 이상, 김철수는 약 12일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조사했다. 보안사가 양씨와 정 의원 등을 영장 없이 불법구금한 것은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 제124조 불법체포·불법감금죄에 해당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서 규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재일동포인 양씨는 1971년 서울대 재외국민교육연구소 입학 및 수료에 이어 1972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대남공작지도원 기무라 등에 교양 및 지시를 받고, 금품을 수수하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보안사에 연행됐다. 진실화해위는 양씨가 장기간 고립된 상태에서 수사관들이 쓰라는 대로 범죄사실을 자백했다는 점과 같은 시기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던 이동석·강종헌·이수희가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진술한 점, 같은 피해자 정 의원 등 4명이 양씨가 북한을 찬양하거나 데모를 선동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한 점 등을 종합할 때 양씨 등은 조사과정에서 자백을 강요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정 의원은 17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1976년 4월께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돼 서울 용산 갈월동 분실에서 양씨와 관련한 조사를 받고 열흘 뒤쯤 각서를 쓰고 풀려난 것으로 드러났다. 정 의원이 끌려간 것은 고교 선배와 대학 과 동기를 통해 양씨를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정 의원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양씨와 같은 교양과정을 들었고 축구를 하기도 했으며, 그의 하숙집 룸메이트를 소개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정 의원은 진실화해위 진술조사에서 “보안사 조사를 받을 때 양남국이 나를 포섭 대상 1호로 삼았다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 양남국이 데모를 주동하도록 선동했던 일은 전혀 없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내가 오히려 재일교포인 양남국을 그런 입장에서 의식화시키려고 했지, 양남국은 사회의식도 없었고, 데모에 참여한 사실도 없었다. 양남국이 북한체제에 대한 얘기를 한 일도 없으며 아주 순진했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기주장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정 의원은 당시 보안사 조사 때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도 상세히 진술했다. 그는 “당시 모나미153 볼펜 심이 다 닳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진술서를 작성했다”며 “.아는 것을 전부 말하라면서 이북사투리를 쓰던 수사관이 ‘너를 죽이고 갈아서 바다 하수구에 넣어버리면 끝이다’라고 협박했고, 열흘 동안 심하게 맞으면서 조사를 받느라 몸과 맘이 많이 다친 상태로 귀대했다”고 진술했다. 정 의원은 이 사건 이전인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강제징집됐다. 정 의원은 12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민청학련 사건 때는 1024명이 조사를 받고 180여명이 구속됐던 때라 각목으로 두들겨 맞는 정도였는데, 보안사에서는 물고문만 빼고 온갖 고문을 다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통화 도중 옛 기억을 떠올리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 당사자 양씨에 대한 진술조사를 받으려 했으나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1971년 양씨와 함께 서울대 재외국민연구소에 다녔고, 비슷한 시기 보안사에 의해 다른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재일동포 이동석(73)씨는 한겨레에 “양남국은 1979년 광복절에 석방돼 일본으로 갔고, 나는 이듬해 석방된 뒤 1982년 일본으로 건너가 서로 여러 차례 만난 기억이 있다. 당시 세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아침저녁으로 신문 운반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가족에게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씨는 “양남국이 보안사로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한 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정 의원은 “내 친구 양남국은 잔인한 군사정권이 저지른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며 “엠비시 기자 시절 일본에 갈 때마다 재일한국인 단체인 민단 등을 통해 백방으로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생사확인이 안 돼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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