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은 측정에 의존해 진단… 가다머, 의사-환자 간 대화 강조
아픔 털어놓는 진솔한 대화 속에 병 원인 찾고 치유할 수 있다 봐
조미료 안 먹고 매일 자전거 타며, 몸-마음 조화 유지가 장수 비결
아픔 털어놓는 진솔한 대화 속에 병 원인 찾고 치유할 수 있다 봐
조미료 안 먹고 매일 자전거 타며, 몸-마음 조화 유지가 장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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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백 살 넘게 장수했던 철학자(위쪽 사진 왼쪽)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철학을 책(위쪽 사진 오른쪽)으로 펴내고,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건강 관리에 신경을 썼다. 가다머에 따르면 장수의 비결은 자전거를 탈 때 지속적으로 균형을 잡아가듯 몸과 마음의 균형을 늘 유지하는 것에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동아일보DB |
《100세 넘게 산 가다머의 건강철학
철학자 가운데 장수한 사람이 많은데, 해석학을 정립한 독일의 한스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도 그중 한 사람이다. 100년을 넘게 살다 보니 그의 장수 비결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젊은 시절 병을 앓은 뒤 건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 화학조미료가 든 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매일 자전거를 꾸준히 탔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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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
그는 또 자신의 건강에 대한 철학을 책으로 펴냈다. ‘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의 ‘치료와 대화’와 ‘해석학과 정신의학’ 장에서는 건강과 질병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근대과학의 장점이 측정 기술에 있다면, 현대의학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에는 의사의 육안으로 진단했지만 오늘날에는 X선 촬영,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등을 활용하는 덕분에 진단 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했다. 우리는 병원에 가면 체온, 체중, 혈압 등 몸의 상태를 측정해 수치로 확인하게 된다.
가다머는 이러한 의학기술만으로 건강과 질병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플라톤처럼 ‘척도’(메트로·측정)와 ‘측정’(메트리온·측정되는 것)을 구별하자면, 근대과학은 ‘현상을 측정하고 양화(量化)하는 총체적인 프로그램’만을 추진한다. 의학 역시 환자의 내면 상태보다는 X선이나 MRI 등의 측정 결과를 정리해 건강을 ‘표준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체온의 정상 범위(36.5∼37.2도)를 벗어나면 저체온이나 발열로 간주된다. 그러나 환자 개개인의 내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체온을 표준값에만 맞추려는 시도는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가다머는 말한다.
독일어 ‘치료(Behandlung)’에는 대화와 진단의 의미가 담겨 있다. 병을 진단하는 사람은 임상 자료를 해석할 수 있어야 되는데, 객관적으로 나타난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사와 환자 간의 대화다. “모든 환자는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고,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된 근거를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각이 합치되는 지점을 찾는다면, 질병의 원인을 밝혀 치료와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현대의학이 취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자료를 수집해 질병의 징후와 현상을 숫자, 기호, 이미지로 나타내려는 ‘객관화’의 시도다. 그러나 많은 질병은 원인을 알 수 없으며, 특히 마음의 상처나 절망은 측정이 불가능해 종종 무시되기 일쑤다. “어떤 것이 측정 불가능하다는 말은 현상에 대한 과학주의적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며, 환원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과학의 한계는 모든 경험이 객관화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최첨단 의학 기술로도 측정할 수 없는 것,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이 때문에 측정의 한계를 넘어서는 원인 불명의 희귀질환은 예방뿐만 아니라 치료가 쉽지 않다.
가다머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의 대화로 만들어지는 둘 사이 ‘의미의 공통된 근거’ ‘언어적 지평’이다. 다시 말해 환자의 능동적 참여(질문)와 의사의 세심한 배려(대답)를 통해 다른 차원에서 질병의 원인이 드러날 수 있다. 수술이나 투약 등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순전히 대화를 통해 타인의 마음의 병이 치유될 수 있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해석학이 가장 필요한 분야는 정신의학이다. 아무리 진단 기술과 치료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정신과 의사가 맡는 해석학적 과제는 의사와 환자 간에 파트너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지점에서 절실한 것은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는 진솔한 대화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가 이해받기를 포기하는 순간에도 그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대화적 치료’는 정신분석학에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의사는 객관적 데이터에만 의존해 표준값을 설정하는 데 그치지 말고, 환자와 정신적으로 교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다머는 건강의 수수께끼를 조화와 균형에 있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몸의 조화를 깨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게 좋다. 가령 가공식품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자전거를 잘 타려면 균형을 잘 잡아야 하듯, 식단 관리뿐만 아니라 건강에 대한 생각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한쪽으로 기울면 자전거가 넘어지듯, 균형이 깨지면 건강도 위협받는다.
몸과 마음을 함께 잘 관리해야 한다. 몸의 건강만 챙기다 보면 건강 집착증에 걸릴 수 있다. 지나친 운동도 오히려 몸에 해롭다고 한다.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늘 유지하는 것이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실천한 가다머의 장수 비결인 셈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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