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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법이 아니다…법리가 물리를 닮아야 할 때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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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시민들이 조희대 대법원장과 대법원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시민들이 조희대 대법원장과 대법원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성석 | 미국 켄터키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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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리(法理)와 물리(物理)는 매우 다른 영역이다. 법리는 인간 사회의 정의와 규범을 다루고, 물리는 자연의 질서와 원리를 다룬다. 한쪽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른 한쪽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놀랍게도 공통된 정신을 공유한다. 바로 ‘이성적 고찰과 판단’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에서다. 복잡함 속에서 중요한 본질을 찾고, 일관된 구조를 세우며,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 이 정신은 법리와 물리의 두 기둥을 떠받치는 초석이자 인류 문명의 밑바탕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특히 법리를 다루는 검찰과 법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이러한 공통의 정신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 몇년 사이 반복된 검찰의 편파성과 법원의 모순적 결정들은 더 이상 법리의 공정성과 일관성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 검사와 법관의 정치적 성향이나 정권 코드에 따라 제멋대로다. 같은 사실관계에도 정반대의 판결이 내려지고,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지난 1일 대법원의 야당 대선 후보 이재명에 대한 파기환송 판결은 그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대법관들 사이 견해 차이를 넘어, 법리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편향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불편한 징후다.



필자가 연구하는 실험 물리학에서, 만약 결과가 연구자의 바람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라 부르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해서, 그 이름처럼 연구자의 소견에 따라 상대적으로 바뀐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휘어질 때 연구자가 바라는 대로 제멋대로 된다면, 더 이상 물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법리도 ‘정치적 상대성’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휘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도구이자, 법의 외피를 쓴 정치적 탐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법 해석기관이다. 이곳에서조차 법리가 아닌 정치가 지배하게 된다면, 국민은 더 이상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를 잃은 법치주의는 무용지물이다. 더 나아가, 정의를 잃고 정당성과 공정성이 없는 법치는 공포가 된다.



물리는 반복된 실험과 증명으로 진리에 다가가고, 법리는 일관된 해석과 판례로 정의를 구축해 나간다. 둘 다 이성과 보편적 원리에 대한 존중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지금 사법부가 보여주는 편향과 혼란은, 법리가 더 이상 법리(法理)가 아니라 법리(法利), 즉 법을 이용한 사적, 정치적 이익으로 변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사법부(司法府)인가? 사법부(私法府)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법리의 영역이 물리처럼 오로지 객관적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인간 사회의 정의와 규범을 다루다 보면 객관성을 고집하는 데 부작용과 그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리 적용이 최소한 물리에서처럼 일관되기를, 그리고 법리를 다루는 검찰과 법원이 객관적 사실 앞에서 겸손하기를 바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리와 물리의 공통된 정신인 질서와 원리를 향한 편파적이지 않은 ‘이성적 고찰과 판단’을 되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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