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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는 소리부터 달랐다!... 한국 남자 배구 전성기 이끈 '아시아 거포' 강만수 [K스포츠 레전드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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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강만수 한국배구연맹 유소년육성위원장

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국가대표 시절 강만수(오른쪽)가 강스파이크를 때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가대표 시절 강만수(오른쪽)가 강스파이크를 때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80년대 한국 배구는 강만수로 시작해 강만수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만수는 일단 뛰어올랐다 하면 대포알 같은 소리로 공을 쳐내 상대편 선수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그가 친 공이 블로킹되지 못해 체육관 바닥에 내리 꽂히면 그 진동이 관중석까지 전달됐다는 전설적인 얘기가 전해진다.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다. 덩치가 산만한 선수들이 즐비한 해외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빛났다. 어느 곳이든 강만수를 품은 팀은 항상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오죽했으면 당시 그의 경기를 본 한 외국인 감독이 "강만수 같은 선수 2명만 있으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찬사를 쏟아냈을까.

최근 서울 마포구 한국배구연맹 사무실에서 우리나라 배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불세출의 선수 강만수를 만나 전설 같은 그의 배구 인생을 돌아봤다.

강만수 한국배구연맹 유소년육성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국배구연맹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강만수 한국배구연맹 유소년육성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국배구연맹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시켜서 했는데 잘해서 '최연소' 국가대표까지

시작은 핸드볼이었다. "딱히 운동을 좋아했다기보다 시키니까 잘했고, 잘하니까 더 하게 됐던 것 같다"던 강만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핸드볼을 접했다. 특별활동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하고 축구 골대 옆에 멍하게 서 있으니 선생님이 공이나 한번 받아보라며 던졌는데 곧잘 받은 게 발단이 됐다. 중학교에선 핸드볼부가 없어 잠시 축구부에 발을 디뎠지만,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 한 뼘 정도 크다는 이유로 골키퍼를 맡았는데, 계속 모래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며 모래 먼지를 끼얹는 게 영 맞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중학교 1학년 때 배구로 종목을 바꿨다. '배구 선수가 되겠다'는 대단한 목표나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기왕 시작한 김에 끈질기게 해보자는 마음은 있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강만수는 "훈련 시간 외에도 등하굣길에 있는 큰 나무를 지날 때마다 높은 가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스파이크 연습, 점프 연습을 했던 걸 보면 배구가 재미있긴 했었다 보다"며 웃었다.

숨겨진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자 강만수는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배구 명문고인 부산 성지공고(현 성지고) 2학년 때 종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시골 까까머리 소년은 남다른 강스파이크로 단숨에 전국구 스타가 됐고, 이듬해 만 17세 나이로 뮌헨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며 구기 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갈아치웠다.


국가대표 시절 강만수(가운데).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가대표 시절 강만수(가운데). 한국일보 자료사진


12년간 올림픽만 3번 출전한 최장수 국가대표

강만수의 등장은 한국 남자 배구 전성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동안 우리나라 남자 배구는 아시아를 주름잡았다. 강만수가 대표팀 주전 공격수로 발돋움한 1973년 모스크바유니버시아드 동메달을 시작으로,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5년 제1회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잇따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78년에는 로마세계선수권대회 4위에 오르더니 같은 해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배구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12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올림픽에도 3번이나 출전했다. 후보 선수로 나서 공 대신 주전자를 들었던 1972년 뮌헨 올림픽은 7위에 그쳤지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 때는 각각 6위, 5위로 올라섰다.

선수 시절 훈련하는 강만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수 시절 훈련하는 강만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LA 올림픽 5위는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자 배구 역대 최고 성적으로 남아있지만, 강만수에겐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 아쉬움 가득한 기록이다. 당시 한국은 조별리그 3승 1패로 4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했었는데, 미국의 계략으로 준결승에 나서지 못했다. 미국이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브라질전에 후보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켜 0-3으로 대패하는 바람에 한국과 미국, 브라질이 나란히 3승 1패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세트 득실에서 3위로 밀려나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개최국 미국이 우승을 위해 일부러 져주기 게임을 했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강만수는 "메달 딴다고 정부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잔치용 선물까지 보내줬는데, 다음 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며 "분한 마음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고 털어놨다.


선수 시절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강만수(오른쪽)와 세터 김호철.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수 시절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강만수(오른쪽)와 세터 김호철. 한국일보 자료사진


해외에서 쏟아진 러브콜... 중동·일본서도 훨훨 날아

전성기를 구가하던 강만수는 1980년 돌연 중동으로 향했다. 1978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 이후 이탈리아 팀에서 온 스카우트 제안을 뿌리친 지 2년 만이다. 그는 "솔직히 이탈리아에 가고 싶었지만, 금성통신(현 KB손해보험)에서 한창 뛰던 때라 보내줄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었다"며 "알자지라(아랍에미리트)에서 제안이 왔을 때도 못 갈 줄 알았는데, 다행히 허가가 났다"고 말했다.

알자지라는 강만수에게 연 10만 달러(당시 약 6,000만 원)와 월 2,800달러(당시 170만 원 상당)를 제안했다. 1980년대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이 평균 7,000만 원이었으니 상당한 금액이다. '중동 붐'이 일었을 때라 다행히 알자지라에 한국인 코치가 있어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훈련이었다. 강만수는 "제시간에 훈련을 하려면 미리 와서 네트도 치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매번 늦게 와서 '인살라(신의 뜻대로)~'를 외치고 내게 미루더라"며 "아닌 건 아니라고 호되게 말했고, 서열이 정리되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 말했다. 강만수는 그들의 노력에 결과로 보답했다. 강만수가 활약한 2년간 알자지라는 '만년 2위'를 벗어나 리그 1위에 올랐고, 걸프지역 최강팀들이 출전하는 걸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최강 팀으로 거듭났다.

일본 도레이 배구단 선수 시절의 강만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 도레이 배구단 선수 시절의 강만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만수는 2년 뒤 '코치로 남아달라'는 알자지라의 제안을 뿌리치고 귀국해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지만, 1985년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학업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고 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 특기생으로 합격한 그는 주중엔 공부를 하고, 주말엔 시합을 뛰며 고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2부였던 와세다대를 1부로 끌어올렸다. 1985년에는 33년 만에 와세다대에 우승을 안겨 '강만수'라는 이름 세 글자를 일본 열도에 각인시켰다. 강만수 후원회가 생길 정도였다. 강만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도레이대 대학원에 입학해 실업리그 2부였던 도레이를 1부 리그로 승격시켜 '만사마' 열풍을 일으켰다.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 시절 강만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 시절 강만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슴이 따끔따끔했던 감독 시절

평생 1등이 기본, 못해도 2등이 전부였던 강만수에게 감독 시절은 뼈아픈 기억이다.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던 강만수는 1993년 처음 실업배구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을 맡았을 때까지만 해도 고정관념을 깨는 듯했다. 5차례나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화려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1995년 삼성화재 창단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현대자동차서비스는 1997년부터 줄곧 2위로 밀려났다. 강만수는 "막판에는 너무 힘들어서 못 피우던 담배도 피우고, 못 먹는 술도 마셨다"며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살았고, 때론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왔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결국 9년 만에 지휘봉을 내려놨고, 6년간 야인생활을 했다.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싶어 씁쓸한 마음을 홀로 삼켰다. 대학에서 강의도 해보고, '올드스타'라는 식당을 열어 배구인이 아닌 다른 삶에 도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강만수는 "솔직히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다"며 "힘들었을 텐데도 재촉 한번 하지 않은 아내 덕분에 버틴 것 같다"고 돌아봤다.

2009년 긴 휴식 끝에 KEPCO45(현 한국전력) 사령탑으로 복귀했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직전 시즌을 4승 31패로 마무리한 최하위 팀을 단번에 끌어올리는 건 강만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만수가 가면 우승시킬 수 있다'는 사람들의 기대가 그의 어깨를 천근만근 짓눌렀다. "밥알이 모래알같이 느껴져 밥을 먹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던 2011년 초 강만수는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다. 2년 뒤 우리카드 초대 감독으로 다시 기회를 얻었지만, 이듬해 또다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강만수는 "좀 더 지켜보면서 기회를 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을 흐렸다.

강만수 한국배구연맹 유소년육성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국배구연맹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강만수 한국배구연맹 유소년육성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국배구연맹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허수봉, 임성진 같은 스타 선수 더 많아져야"

강만수는 현재 배구연맹 유소년육성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배구 저변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유망주 조기 발굴을 위한 유소년 배구교실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그가 취임한 2018년 38개교에 그쳤던 배구교실 운영학교는 지난해 46개교로 늘었다. 강만수는 "우리나라 배구가 크려면 엘리트 체육이 잘돼야 한다"며 "배구교실에서도 매년 30~40명씩을 엘리트로 발굴해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엘리트로 발굴해서 보내면 고된 훈련을 이기지 못하고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했다.

배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스타 선수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도 했다. 김연경(은퇴) 같은 스타 선수가 있어야 학생과 학부모들의 관심이 커지기 때문이다. 강만수는 "(유소년 육성에) 스타 선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며 "허수봉(현대캐피탈)이나 임성진(KB손해보험)처럼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선수들이 꾸준히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자료조사 성민호 대리 minhoseo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