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산 계남근린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벤치 사이에 있는 너구리를 피해 걸었다. 너구리는 털이 빠지고 피부가 갈라져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너구리를 한참 쳐다보다 주변 사람에게 "신고를 어디에 해야하냐"고 묻는 시민도 있었다. 몇몇 시민은 잠든 너구리를 보고 "죽은 거 아니냐"며 다가가려 했다. 다른 시민이 "병이 걸린 너구리라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말렸다.
양천구 일대에서 개선충에 걸려 털이 빠진 너구리가 잇따라 포착되고 있다. 개선충은 진드기의 일종으로 심한 가려움증을 일으킨다. 너구리와 직접 접촉할 경우 사람에게 옮길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양천구 주민 김상은씨(33)는 "아픈 너구리가 등산 때마다 매번 보인다"며 "지난해 이맘때도 너구리가 자주 나왔는데 그땐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 모습을 보면 소름이 끼치고 기괴하다"고 했다.
이날 김씨는 키우던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김씨는 "아무래도 반려견을 키우다 보니 더 걱정된다. 접촉하면 병이 옮을까봐 근처에도 못 가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려견이 너구리에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가려 하자 김씨는 강하게 목줄을 잡았다.
최근 3년 서울시 너구리 구조 현황(왼쪽)과 2025년 양천구 너구리 구조현황(오른쪽). /그래픽=윤선정 기자. |
서울시에 따르면 시 야생동물구조센터의 너구리 구조건수는 늘어나는 추세다. 양천구청은 신정산(계남공원)과 지양산(온수공원)을 중심으로 구 전역에서 너구리와 관련된 민원들이 최근 들어 다수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만 양천구에서 13건 구조했다. 이 중 지난달에만 5건이 기록됐다.
양천구에 20년 넘게 살고 있다는 50대 남성 이모씨는 "내가 매일 등산을 오는데 한 달 전부터 털 빠진 너구리가 보인다"며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빨리 치료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씨는 "양지바른 곳에 누워 계속 피부를 긁고 있는데 안쓰럽고 보기에도 안 좋다"며 "이웃들 말을 들어보면 주민들이 많은 아파트 화단이나 학교 인근까지도 아픈 너구리가 내려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날 너구리를 발견한 계남근린공원 인근에는 신기초·덕의초등학교를 비롯해 3개의 중고등학교와 아파트단지가 있었다.
등산객 50대 남성 이모씨가 지난 4월3일 계남근린공원 일대에서 너구리를 찍은 사진. 이씨는 약 한달 전부터 병에 걸린 너구리가 자주 보인다고 했다. /사진=독자 제공. |
구청에 따르면 4월2일 병에 걸린 야생 너구리 구조요청 민원을 시작으로 같은달 3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게시판 전체의 너구리 관련 민원 건수는 2023년 이후로 총 6건으로 집계됐다. 최근 연속된 민원에는 '아이들이 많이 활동하는 공원에 병 걸린 너구리가 자주 보인다' '길고양이 등으로 옮겨 질병이 확산할까 걱정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양천구는 너구리 포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양천구청 관계자는 "민원인 신고를 접수해 현장에 나가도 너구리가 없는 상황이 많다"며 "감염된 너구리를 잡으려 포획틀을 설치하면 일반 너구리가 걸릴 때도 있어서 너구리가 다치지 않도록 매일 순찰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너구리를 발견하는 즉시 관할 지자체에 신고하고 접촉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연성찬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해당 너구리들은 개선충 감염 개체로 추측된다"며 "최근 들어 너구리들이 먹이를 찾으러 사람이 많은 등산로까지도 내려오는 경향이 있는데, 개선충은 동물과 사람 모두 걸릴 수 있는 진드기성 질환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은씨(33)의 반려견이 벤치 사이 너구리를 발견하자 호기심을 보였고, 김씨는 가까이 가지 못하게 목줄을 꽉 잡았다. 시민들은 병 걸린 너구리를 피해 등산로 가장자리로 걷고 벤치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사진=오석진 기자. |
오석진 기자 5ston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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