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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핑크 용궁여왕’으로 무용 데뷔한 채시라…“이래서 대배우구나”

헤럴드경제 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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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K-컬처 시리즈 ‘단심’
심청의 복잡한 내면 들여다본 연희극
채시라 출연·정구호 연출·정혜진 안무
오는 8일부터 두 달간 50회 장기 공연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린 개관 30주년 기념 전통연희극 ‘단심’(單沈) 프레스콜에서 정식 무용수로 데뷔한 배우 채시라가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린 개관 30주년 기념 전통연희극 ‘단심’(單沈) 프레스콜에서 정식 무용수로 데뷔한 배우 채시라가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



[헤렬드경제=고승희 기자]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을 맞이하는 용궁. 찬란한 분홍 물결이 일렁였다. 깊고 푸른 용궁을 지배하는 여왕의 세계는 심청을 집어삼킨 칠흑 같은 어둠의 바다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눈부시도록 화사한 세계는 고통스럽게 인당수를 넘어온 심청이 삶의 끝에서 만난 구원이었다.

연꽃 부채를 든 용궁 여왕이 바닥에 엎드린 심청을 일으키더니 ‘환영의 춤사위’를 시작한다. 10여명의 용궁 시녀는 일렬로 늘어서다 원을 그리며 여왕과 함께 긍정만이 가득한 미래를 그린다. 그곳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온화한 미소의 용궁 여왕의 단단하고 우아한 동작에 심청은 이것이 생인지 죽음인지, 꿈인지 현실인지도 잊은 것처럼 보인다.

배우 채시라가 지상 최대 ‘판타지’의 주인공이 돼 단정한 춤선으로 심청을 보듬었다. 고전 설화 ‘심청’을 소재로 한 국립정동극장의 전통연희극 ‘단심(單沈)’을 통해서다.

채시라는 지난 8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배우가 되기 전 무용수를 꿈꿨는데, 내 이름 앞에 무용수라는 수식어가 붙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며 웃었다.

마침내 ‘꿈’을 이뤘다. 시대를 풍미한 청춘스타였고 사극에선 중전마마, 대왕대비 단골이었던 그가 이젠 무용수로 관객 앞에 선다. 채시라가 ‘단심’에서 맡은 용궁 여왕은 ‘단심’이 그리는 유일한 판타지 장면이다.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디즈니의 세계 같기도, 바비의 세계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국립정동극장이 개관 3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K-컬처 시리즈의 일환이다.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심청의 군더더기를 덜고, 심청의 내면에만 집중해 무용극으로 풀어간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이야기를 ‘효의 관점’이 아닌 ‘내면의 갈등’에 초점을 둔다.


연출을 맡은 정구호는 “과거 효(孝) 사상이 무조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해도 심청이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 100% 만족했을지 생각해 봤다”며 “겉으로 보이는 심청의 모습과 내면을 분리하는 것에서 시작해 심청의 시점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전통연희극 ‘단심’에서 용궁 여왕역을 맡은 채시라

애초 용궁 여왕은 ‘심청’엔 등장하지 않는다. 용왕을 대체해 설정한 이 캐릭터는 심청에겐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정구호 연출가는 “용왕을 여왕으로 바꾼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심청이 용궁에서 따뜻한 모정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귀띔했다.

채시라가 그려갈 용궁 여왕은 연기와 무용을 두루 겸한다. 군무를 선보일 정동극장 예술단 단원들 사이에서도 채시라는 흔들림 없이 안무를 따라갔다. 채시라는 지난해 서울무용제 홍보대사를 맡았고, 앞서 ‘해신’, ‘최승희’ 등의 드라마를 통해 춤을 선보였지만 이번만큼 긴 춤을 추진 않았다.


그는 “무대에서 14분 정도 오롯이 춤과 연기가 어우러진다”며 “(서울무용제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을 이뤘다. 연습 과정은 훈련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들였고, 정혜진 안무가께서 나를 가르치느라 너무 애썼다”며 웃었다.

안무는 정혜진 전 서울시무용단 단장이 맡았다. 단정하면서도 박력 있고 격정적 감정을 토로하는 안무가 특징적이다. 특히 빠른 호흡의 칼군무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은 만큼 예술단과 채시라에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정혜진 안무가는 “채시라 씨는 굉장히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려 하는 자세로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 동안 연습하고 있다”며 “몸을 사리지 않고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근성을 보면서 ‘대배우는 다르구나’ 생각하며 작업했다”고 했다.


특히나 어려운 동작이 많았음에도 채시라는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안무를 고쳐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연기보다 춤이 더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정 안무가에게 몇 번이나 전했다고 한다.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린 개관 30주년 기념 전통연희극 ‘단심’(單沈) 프레스콜에서 정식 무용수로 데뷔한 배우 채시라가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린 개관 30주년 기념 전통연희극 ‘단심’(單沈) 프레스콜에서 정식 무용수로 데뷔한 배우 채시라가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



채시라는 “춤을 출 때 박자를 맞춰야 하는데 감정에 따라 춤을 추면 박자를 놓치고, 박자를 세면 감정이 안 살아 ‘숫자의 지옥’에 갇힌 기분이었다”며 “안무 순서와 박자, 동작을 모두 해내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군무가 마음처럼 잘 안돼 핫크림과 아이싱으로 몸을 풀며 연습했다”고 귀띔했다.

채시라가 등장하는 2막의 용궁 장면은 완전한 판타지처럼 연출했으나, 1막과 3막은 한국적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정 안무가는 “3막 궁중 연희 장면에선 1920년대 복식을 바탕에 둔 독특한 의상이 등장한다”며 “무용으로 줄거리를 설명하는 연희극이기 때문에 춤과 의상 등으로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이번 ‘단심’(5월 8일~6월 28일까지)은 국립정동극장이 올해 대대적으로 이어갈 K-컬처 시리즈의 하나로 무려 두 달간, 총 50회차 공연으로 관객과 만난다. 지금까지 국립예술단체의 공연이 이토록 장기간 공연한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정성숙 국립정동극장 대표는 “동시대 공연예술로 전통공연도 관객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장기 공연을 결정했다”며 “그간 좋은 작품을 올려도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도 일정이 맞지 않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장기 공연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심’은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와 연계, 특별공연도 준비 중이다.

정구호 연출가는 “공연 책자에 심청의 기본적인 줄거리를 소개하고, (무대 위로 흐르는) 영어 자막에도 설명을 넣어 외국인 관객도 어렵지 않게 접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