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열리는 파리의 트로카데로 노천 재래시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21세기 한국인은 전통시장보다 마트와 대형 할인매장을 선호한다. ‘전통’시장이나 ‘재래’시장이라는 명칭 자체가 시장은 구식이라는 인식을 은연중 드러낸다. 주차도 불편하고 가격도 불투명한 시장은 정찰제에 넓은 주차장을 갖춘 마트에 패배했다.
시장은 수많은 소상공인이 자신만의 개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존하는 공간이다. 각 점포는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진 ‘주인’에 의해 운영된다. 이들은 단순히 상품 거래를 넘어, 대화하고, 흥정하며, 때로는 정보와 소식을 나누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시장은 단순한 상거래 장소를 넘어 도시의 문화적 디엔에이를 간직한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반면, 마트와 할인매장은 효율성과 편리함을 극대화한 공간이다. 상품 배치, 가격, 고객의 동선 등 모든 요소가 ‘본사’에 의해 계산되고 통제된다. 직원들은 매뉴얼에 따라 (다른 일자리로 옮기면 쉽게 사라질) 단순 지식 정도만 교육받는다. 시민 역시 익명의 ‘소비자’로만 존재한다. 이처럼 마트의 승리는 사실, 다양한 전문지식과 경험의 축적을 매뉴얼이 지배하는 단순 노동으로 대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지난 20년간 전통시장을 몰아냈던 마트와 할인매장이 지금은 자신이 승리했던 똑같은 이유로 온라인 시장에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트 자신이 맹신했던 더 싸고, 더 편리한 것만 살아남는 구조다. 그 와중에 살아남는 것은 소수의 자본이고, 매뉴얼에 의해 우민화된 직원들은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었고, 소비자는 더 큰 편리와 저가로 버무려진 달콤한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시장에서는 전문가인 주인과 대화하며 신선도와 제철 여부를 확인하고 구매한다. 상품을 매개로 대화와 교류가 자연스레 생긴다. 하지만 마트에서는 본사 전략대로 진열된 상품을 가격표와 포장 정보로만 골라 무표정한 계산원의 스캔을 거칠 뿐이다. 최근에는 무인마트의 등장으로 비대면 구매는 가속화하고 그럴수록 사람은 사라져 간다. 도시적 관점에서 마트는 소수의 ‘자본’이 지배하는 (크지만) 단절된 건축물이다. 반면 시장은 다수의 ‘주인’들이 모여 만들어 낸 (작지만) 연결된 도시다. 그러기에 마트와 시장의 관계는 단순한 상업 구조 차이를 넘어, 도시 공동체의 정체성과 미래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서울 면적의 6분의 1, 인구는 5분의 1에 불과한 파리에는 주말마다 80개의 장이 열린다. 백화점과 대형 할인매장 같은 현대적 유통 공간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나라인데도 왜 그리 재래시장에 집착하는 걸까. 그것은 시장이 지닌 도시적 가치 때문이다. 즉, 시장을 단순한 상거래 공간이 아닌, 도시 공동체의 결속력 강화와 시민 개개인이 주체적인 존재로 남게 도와주는 최후의 사회적 공간으로 여긴다는 의미다.
최근 국내 일부 도시들도 이런 인식 전환을 통해 재래시장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단순한 향수나 관광 상품화가 아닌, 현대적 맥락에서 시장의 사회적, 문화적 역할을 재해석하는 시도다. 서울 통인시장의 ‘도시락 카페’나 광주 1913송정시장의 청년 창업 공간처럼,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혁신적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편리’라는 종교가 지배하는 오늘날, 쉽지는 않겠지만 그 시도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도시는 결국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살고, 일하고, 교류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장이 사라진 도시에서 우리는 도시의 주인일까, 피고용인일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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