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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는 인구가 적고 면적도 작지만 중·동부 유럽 물류의 거점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슬로베니아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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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Slovenia), 슬라보니아(Slavonia), 슬로바키아(Slovakia). 발음이 비슷한 이 세 개의 지명은 우리에게 낯설고 쉽게 혼동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이 지역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현지에 익숙하지 않다면 차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슬라보니아는 헝가리와 세르비아 국경과 맞닿아 있는 크로아티아 북동부의 대평야 지역을 일컫는다. 슬로바키아는 한때 한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93년 분리 독립한 내륙국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슬로베니아는 중부 유럽 속 대국들 한쪽에 자리잡은 소국으로, 수도인 류블랴나와 아름다운 자연으로 대표되는 블레드 호수 이외에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인구는 적지만 부유한 국가
슬로베니아의 인구는 대구광역시보다 조금 적은 212만 명이다. 면적은 경상북도보다 약간 넓다. 알프스산맥 끝자락의 자연 말고는 내세울 만한 자원도 없고 내수시장도 작은 편이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3만6천달러(약 5200만원, 2024년 기준)로 우리나라(3만7천달러)와 거의 비슷하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는 중부 및 남동부 유럽에서 독보적인 1위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도 북서쪽의 변방에 불과했던 슬로베니아가 어떻게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지난 1년 반 동안 슬로베니아 시장을 지켜보며 몇 가지 ‘비결’을 발견했다.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 류블랴나에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주요 도시까지 차량으로 5시간 안에 접근이 가능할 만큼 지리적 강점이 탁월하다. 이에 더해 유럽의 제조기지라 할 수 있는 중부 및 동부 유럽 대부분이 내륙에 갇혀 있어 아드리아해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의 코페르항은 이들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물류의 핵심 거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경제 성과가 단지 지리적 요인만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핵심은 산업구조와 인적자본의 전략적 활용에 있다. 슬로베니아는 유고연방 시절을 포함해 꽤 오랫동안 자율적 경제 운영이 이뤄졌던 지역이다. 1991년 유고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한 뒤에도 10일이라는 짧은 전쟁을 겪긴 했지만 이후 벌어진 참혹하고 길었던 유혈 내전(1991~2001)을 비껴갔다. 덕분에 기존 산업 기반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유고연방은 현재 7개국으로 독립된 채로 각자도생 중인데 이들 중 유럽연합(2004), 나토(2004), 유로존(2007), 솅겐조약(2007), 경제협력개발기구(2010) 등 서구의 주요 국제기구에 모두 가입한 국가는 슬로베니아가 유일하다. 이처럼 선진 국제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독립국가에서는 실패로 점철됐던 졸속 민영화를 피했고 시장경제로의 점진적인 이행이 원활하게 진행됐다. 이에 사회주의적 계획성과 서구식 효율성을 조화시킨 체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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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력은 고부가가치 산업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관련 산업에 필요한 고숙련 인재가 실무 중심의 교육과 직업훈련 체계를 통해 꾸준히 공급돼, 이상적인 산업구조를 완성해나갔다.
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자동차 산업은 전체 GDP의 10%,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주력 부문 중 하나다. 280여 개의 부품 제조사가 유럽 주요 자동차의 브랜드 개발·설계 단계에 참여 중이다. 유럽에서 생산되는 모든 차량에 적어도 하나의 부품이 슬로베니아산일 정도다.
글로벌 제조사들의 진출 상황을 보면 슬로베니아의 경쟁력이 더욱 분명해진다. 프랑스 르노는 슬로베니아 업체 레보즈(Revoz)와 1973년부터 협력을 시작했다. 르노는 2004년 레보즈를 100% 인수해 클리오(Clio), 트윙고(Twingo) 등 연간 6만여 대의 완성차를 생산 중이다.
독일의 보쉬렉스로스(Bosch Rexroth)도 1998년 슬로베니아에 진출해 생산 자동화를 위한 고난도 장비를 제조하며 2028년까지 100억유로의 매출을 목표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스페인의 곤바리(Gonvarri)가 2024년 히드리아(Hidria)를 인수해 전기모터 핵심부품 제조를 선도하고 있으며 2027년까지 생산시설을 추가로 확장할 계획이다.
자동차·제약 수출 효자 품목
제약산업도 슬로베니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의약품은 2024년 기준으로 전체 수출의 34.3%를 차지하며 제1 수출 품목으로 자리잡았다. 7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제네릭 제약사 크르카(Krka)그룹은 연간 180억 개의 정제 및 캡슐 제품을 생산한다. 2024년에는 연 매출 19억유로를 달성하며 세계적인 제약사로 성장 중이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약회사 레크(Lek)는 제네릭 및 바이오시밀러 제품으로 2024년 매출 16억유로를 기록하면서 크르카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2002년 스위스 노바티스에 인수돼 현재는 산도스(Sandoz)라는 브랜드로 독립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산업의 이런 탄탄한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우리나라 중소·중견기업도 첫 유럽시장 진출 지역으로 과감히 슬로베니아를 선택하고 있다. 2015년에는 우신라보타치가 류블랴나 인근 산업도시인 그로수플레 지역에 제조공장을 설립해 의약품 패치 제품을 생산 중이다. 2024년에는 티앤엘(T&L)이 현지 의료용 대마 제조사와 원료공급 협력 계약을 체결했고 2025년 하반기부터는 제2 도시인 마리보르 공장에서 피부 치료용 패치 제품을 본격 생산할 계획이다.
물류 측면에서는 코페르항이 아드리아해에서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짧은 해안선임에도 이 항만은 최대 컨테이너 물동량을 자랑한다. 2024년 컨테이너 처리량은 113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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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해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의 코페르항은 대부분이 내륙에 갇혀 있는 중부 및 동부 유럽 국가에는 없어서는 안 될 물류의 핵심 거점이다. 코페르항 누리집 |
주요 국외 제조공장이 동부 유럽 내륙국가에 있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도 코페르항은 원활한 공급망 체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프라다.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현대글로비스는 지사를 설립해 동유럽 생산공장에 필요한 자재들을 공급 중이다. 포스코가 코페르항과 합작한 POSCO-ESDC는 항만 내 1만㎡ 면적의 전용창고를 통해 공급망을 확대하고 있다. 중소 규모로는 하나로티엔에스(TNS)와 이로지스(E-logis)가 항만 인근에 복합 물류창고를 운영하면서 우리 진출기업이 필요한 기자재 등을 적시에 공급 중이다.
에너지 및 에너지전환도 국가 전략의 핵심이다. 중남부 유럽에서 유일한 원자력발전소가 슬로베니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고연방 시절이던 1983년 미국 웨스팅하우스 기술로 건설된 크르슈코(Krško) 원전에 이어 신규 원전(JEK2) 추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국영 원전운영사인 젠에너지(Gen Energija)는 2025년 1월 말 웨스팅하우스와 프랑스전력공사를 신규 원전 건설의 최종후보로 발표했다. 향후 두 회사에 대한 기술 타당성 심사 결과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2028년에 투자 결정이 이뤄질 계획이다. 슬로베니아의 에너지 자급률은 원자력(43%)과 재생에너지(36%)를 기반으로 50%를 훌쩍 넘어섰다.
제도적으로도 고숙련 외국 인재 유치와 기업 투자 유인을 위한 정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유럽연합 블루카드 제도(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제3국 국적의 고급인력을 위한 특별 체류자격이자 취업비자) 강화, 40살 미만 고소득 외국인 대상의 소득공제 신설 등 다양한 제도 개편이 진행됐다. 이러한 유연한 제도 기반은 교육시스템과 맞물려 산업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공계 중심의 고등교육과 독일식 직업훈련은 슬로베니아가 강점을 지닌 정밀 제조, 정보통신기술(ICT), 바이오 분야의 핵심 인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성장동력 약화됐지만 회복 전망
슬로베니아도 한국처럼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예전의 성장동력이 많이 약화했다. 2022년까지 2%를 고수하던 경제성장이 2024년에는 1.6%까지 둔화해 2020년 이후 최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정부 지출과 민간 소비가 여전히 확대 추세여서 2025년부터는 다시 2%대로 완만한 회복세를 전망한다. 인플레이션도 2%대에서 안정세를 보일 전망이다.
슬로베니아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작지만 틈새에 강함’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단순한 소비시장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유럽 중앙을 기점으로 오른편에 있는 거대한 시장으로의 진출하는 데는 이만한 전략적 거점이 없을 것이다. 스마트 물류, 기술 협력, 에너지 전환의 교두보로 슬로베니아에 주목하고 전기차, 우주기술, 스마트시티, 친환경 소재 등 기술집약 산업 분야에서 우리 기업이 진출한다면, 작지만 틈새에 강한 슬로베니아에서도 또 다른 틈새시장이 보일 것이다.
윤태웅 KOTRA 자그레브무역관장 twyoun@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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