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건축물로 개방감이 큰 공간이다. 박미향 기자 |
고양~의정부 21년 만에 재개통
예쁜 복고풍 기차 매력에 ‘폭폭’
부대찌개·평양냉면 맛집 그득
음악·미술도서관에서 마음 치유
이승호(23)씨는 기차 마니아다. 중학생 때부터 기차에 빠진 그는 국내 열차 대부분을 타봤다. 단지 이동 수단으로만 취급받는 기차가 그에겐 호기심의 대상이자, 자신의 취향을 한껏 드러내는 도구였다. 지난 4월4일 그는 교외선에 몸을 실었다. “21년 만에 재개통한 기차가 궁금했고, 수도권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높은데다가 열차 도색도 특별해 여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21년 만에 다시 달리기 시작한 교외선 모습.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색과 모양새 때문에 인기가 많다. 박미향 기자 |
21년 만에 다시 달리기 시작한 교외선을 즐기고 있는 여행객. 박미향 기자 |
2004년 운행이 중단된 교외선이 지난 1월11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21년 만이다. 과거 경기 북부 지역의 교통을 책임졌던 무궁화호 열차가 교외선이다.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를 관통하는 교외선은 2량으로 총 6개 역(대곡역, 원릉역, 일영역, 장흥역, 송추역, 의정부역) 30.5㎞ 거리를 54분에 주파하며 하루 왕복 20회 오간다. 편도 요금은 2600원. 하루 자유이용패스(4천원, ‘코레일톡’에서 예매)도 있다.
재개통 이유는 최근 ‘레트로 열차’가 새 관광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외선 구간은 과거 대학생들의 단골 모꼬지(MT) 장소였다. 5060세대에겐 추억 가득한 여행지다. 개통 첫날 조기 매진되며 당일 하루만 1354명이 이용했다. 요즘 주말 평균 이용객은 1천명 남짓이다. 열차 자체를 탐험하며 정차 지역마다 넘치는 볼거리도 둘러보면 더없이 특별한 당일치기 여행이 된다.
교외선 정차역 중 하나인 일영역 풍경. 방탄소년단의 ‘봄날’ 뮤직비디오 촬영지다. 박미향 기자 |
느려서 더 좋은 완행열차
4월4일 오전 9시30분. 9시56분 출발 의정부행 교외선을 타기 위해 대곡역에 도착했다. 발권하는 데는 없다. 승차권은 자동발매기나 코레일톡을 이용해 구매해야 한다. 이날 열차 출발 전부터 신박한 풍경이 목격됐다. 일찌감치 도착한 승객들이 탑승하지 않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기차를 연신 찍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열차 색이 여느 기차와 달랐다. 차가운 금속색이 아니다. 짙은 노란색과 갈색, 녹색이 어우러진 1970~80년대풍 기차다. 일본 에스에프(SF) 만화 ‘은하철도 999’의 추억도 떠오른다. 고양시에 거주하는 김아무개(55)씨는 “기차 자체가 어떤 모양인지, 무슨 색인지 알고 싶어 타러 왔다”고 했다. 동행한 10대 아들은 “기차가 예쁘다”고 했다.
교외선 지도. 성기령 기자 |
덜컹덜컹, 두런두런. 수다가 좌석마다 넘쳤다. 아이가 맨발로 뛰어다녀도 항의하는 이가 없었다. 열차의 낭만을 고스란히 즐기는 승객이 대부분이다. 1호와 2호 사이 연결 구간에서 열차 여행을 즐기던 이승호씨는 교외선의 매력을 “천천히 달리기에 바깥 풍경을 더 자세히 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창밖으로 산이 지나갔다. 꽃도 휘릭 인사하고 떠났다. 역 근처 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 사는 50대 이아무개씨는 “농사짓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 봐서 좋다”고 했다.
이윽고 일영역에 정차하자 분주해지는 이들이 있었다. 이 역은 2017년 공개된 방탄소년단(BTS)의 ‘봄날’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다. 급하게 내려 카메라에 역 풍경을 담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일영역은 교외선 상행선과 하행선이 교차하는 역이다. 단선철도인 교외선에서 유일한 복선 구간이다. 교차하는 두 열차의 이색적인 풍경을 목도할 수 있다. 코레일은 주말과 공휴일에 상·하행선 각 3회 10분씩 정차 시간을 늘려 운영한다.(출발시각 상행 오전 11시15분, 오후 12시50분, 2시25분/하행 오전 11시22분, 오후 12시57분, 2시32분) 하루 자유이용패스를 구입하면 다급하게 셔터를 누를 필요가 없다.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 있는 ‘의정부음악도서관’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너른 실내가 매력적이어서 찾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 박미향 기자 |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 있는 ‘의정부음악도서관’. 박미향 기자 |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 있는 ‘의정부음악도서관’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너른 실내가 매력적이어서 찾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 박미향 기자 |
도서관에서 즐기는 LP 음악
열차만 여행하면 섭섭하다. 정차 지역마다 설레는 여행지가 많다. 오전 9시56분에 대곡역을 출발한 교외선은 오전 10시50분에 의정부역에 도착했다. 의정부를 대표하는 ‘여행’은 ‘맛’이다. 1960년에 문 연 ‘오뎅식당’을 필두로 한 부대찌개거리, 평양냉면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평양면옥’ 본점 등 전국구 맛집이 포진해 있는 곳이 의정부다. 하지만 최근엔 이들 맛집이 밀린다. 도서관이 의정부 여행의 새 열쇳말로 뜨고 있다. 이날 오뎅식당은 북적였다. 노포의 맛이 도서관 여행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오뎅식당 인근에 있는 경전철 의정부중앙역에서 발곡역으로 향했다.
1960년에 문 연 ‘오뎅식당’ 음식. 박미향 기자 |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는 국내 첫 음악도서관인 ‘의정부음악도서관’이 있다. 2019년 민락동 ‘하늘능선근린공원’에 문 연 ‘의정부미술도서관’에 이어 의정부시가 개관한 공공도서관이다. 2021년 6월3일 개관했다. 들어서자마자 통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온몸을 휘감았다. 빛이 그린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1만368㎡ 대지에 올린 3층짜리 건물엔 상상도 못 할 ‘평화’가 흘렀다. 동화책을 고르는 아이, 창가 빛 속에서 책 읽는 노인, 2층에 구비된 귀한 음악잡지를 뒤적이는 청년, 3층에 구비된 시디(CD)나 엘피(LP) 등을 살피는 중년 등 모두가 각자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 있는 ‘의정부음악도서관’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너른 실내가 매력적이어서 찾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 박미향 기자 |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 있는 ‘의정부음악도서관’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너른 실내가 매력적이어서 찾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 박미향 기자 |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인근 ‘장암발곡근린공원’에 있는 ‘의정부음악도서관’. 박미향 기자 |
명색이 음악도서관인데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잘 살피자 곳곳에 음악이 있었다. 3층 오디오룸에선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자 우주 한가운데 떨어진 것처럼 고요가 감쌌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음악은 의사 처방전과 다름없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 묻혀 잊힌 상처가 치유 과정에 들어갔다. 오디오룸에선 하루 2~4번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영상이 상영된다. 엘피판을 턴테이블에서 들을 수도 있다. 이날 만난 20대 여성은 “턴테이블 특유의 ‘찌직’ 하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최대 30분간 피아노 연주가 가능한 방 ‘스튜디오’와 ‘뮤직홀’도 있다. ‘임희윤 문화전문기자가 들려주는 팝 이야기’ 등 각종 음악 강연도 준비돼 있다. 재즈, 블루스, 가스펠, 솔, 힙합 등 20세기에 등장해 대중음악의 원천이 된 ‘블랙뮤직’ 자료도 갖춘 도서관이다. 음악 관련 책과 일반 도서, 아동 도서를 합쳐 1만3115권, 악보 3472점, 시디 8568점, 디브이디 1876점, 엘피 2458점이 비치돼 있다.
의정부 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건축물로 개방감이 큰 공간이다. 박미향 기자 |
의정부 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건축물로 개방감이 큰 공간이다. 박미향 기자 |
단짝처럼 의정부 여행의 주축인 ‘의정부미술도서관’은 대지 2645㎡ 규모에 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이다. 보유한 장서는 5만6321권. ‘그저 미술책이나 갖다 놓은 도서관이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도서관 자체가 미술품이다. 슬로건 ‘도서관을 품은 미술관, 미술관을 품은 도서관’에 걸맞게 책과 예술이 어우러진 문화공간이다. 외관부터 예사롭지 않다. 태극무늬를 형상화한 곡선이 춤춘다. 실내 한쪽 벽은 가로세로 창틀로 짜진 통창이고, 위로 향하는 계단과 탁자, 의자 등은 곡선이다. 고립과 단절을 상징하는 닫힌 벽이 없는 개방형이다. 위와 아래를 자연스럽게 연결한 나선형 계단은 현대 미술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듯한 모양새다. 이날 도서관의 정수를 목격했다. 경직된 채 공부하거나 책 읽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숨 막힐 듯, 이용객을 잠식해 들어가는 침묵과 적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자나 탁자, 소파 등이 섬세하게 이용자 편의대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의정부 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건축물로 개방감이 큰 공간이다. 박미향 기자 |
의정부 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건축물로 개방감이 큰 공간이다. 박미향 기자 |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 이유엔 특별한 도서관 설계가 있다. 의정부시에서 머물며 활동했던 백영수(1922~2018) 화가의 작품을 공간 구성에 차용했다. 목포고등여학교 미술 교사, 조선대 미대 교수를 짧은 기간 역임한 그는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화가와 함께 신사실파를 창립한 국내 대표 화가다. 동료들에 견줘 그의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대표작들을 보면 ‘아, 이 사람’이라고 손바닥을 치게 된다. 스테디셀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표지도 그의 작품이다. 도서관 곳곳에 그의 작품 ‘새와 소년’(1976), ‘이른 봄’(1969), ‘나무 있는 집’(2001) 등이 어른거린다. 수줍고 내성적인 그가 26살 연하의 아내를 만나 49살에 첫딸을 낳아 그리기 시작한 ‘모자상’ 시리즈는 평온과 단순함, 안정감의 상징이다. 이런 그의 화풍이 국내 가장 근사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의정부시에는 ‘백영수미술관’도 있다. 화가가 1973년에 직접 지은 집으로, 별세하기 전까지 머무른 곳이다.
의정부 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르고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박미향 기자 |
지난해 미술관을 다녀간 이는 49만명. 지난 3월 한달 방문객 수는 3만9543명이다. 1년에 세번 기획전시를 한다. 이때는 하루 두번 도슨트 전시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책과 함께하는 아트테라피’는 장애인 대상 예술 프로그램이다. 오는 6월 어린이들 체험 프로그램 전시를 계획 중이다.
장흥에 있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안에 있는 미술관 건물에는 장욱진 작품 이외에 다른 작가 작품도 전시돼 있다. 박미향 기자 |
낮에도 별 보이는 천문대
일영역 인근에 ‘천생연분 마을’ 등이, 원릉역 근처엔 ‘서삼릉’ 등이 있지만, 본래 카페촌으로 유명했던 장흥역 인근엔 한국 현대 미술사에 궤적을 남긴 예술가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장흥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가나아트파크’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송암스페이스센터’ 등이 몰려 있는 데에 도착한다.
4월6일 찾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건물은 왜소해 보이지만 들어서자 너른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경하지만 예술적 감성이 충만한 작품이 가득했다. 정원을 둘러본 뒤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순백색 미술관 건물이 보인다. 건물 앞 공터에 높이 6m의 조형물 ‘히어’(Here, 나점수, 2012)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건물 바로 앞에 있는 높이 70㎝ 작품 ‘어린 왕자가 있는 풍경’(김정연, 2012)과 대비된다. 건물 뒤편에 있는 전윤조 작가의 작품명이 마음에 남는다. ‘머리가 알지 못하는 마음: 2013’.
장흥에 있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안에 있는 미술관 건물에는 장욱진 작품 이외에 다른 작가 작품도 전시돼 있다. 박미향 기자 |
‘가나아트파크’ 야외 공간. 박미향 기자 |
‘가나아트파크’ 야외 공간. 박미향 기자 |
미술관엔 집, 가족, 아이, 숲과 나무 등의 소재를 대담하면서도 정겹게 그려낸 한국 대표 미술가 장욱진(1917~1990)의 작품이 곳곳에 걸려 있다. ‘얼굴’(1962), ‘나무’(1987) 등을 둘러보고 ‘자화상’(1986)을 만났다. 예술에만 몰입하며 고요와 자발적 고립을 친구 삼은 그의 삶을 목도하게 된다. 바로 앞엔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있다. 조각가 민복진(1927~2016)이 가족 사랑에 천착해 빚은 작품 다수를 만난다.
걸어서 3~5분 거리에 있는 ‘가나아트파크’는 1984년 국내 최초로 건립된 사립미술관이다. 정원에 친환경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과 여행하기 맞춤하다. 야외정원, 전시 건물 4동, 어린이 체험관, 카페와 야외공연장 등으로 구성됐다. 이 중 ‘피카소어린이미술관’엔 피카소 진품 100여점과 그의 삶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국내 유일하다. 건물조차 작품인 이곳은 ‘정성’이 예술과 만났을 때 경험하게 되는 풍요를 실감하게 한다.
‘가나아트파크’ 야외 공간. 박미향 기자 |
‘가나아트파크’ 전시 공간 중 하나인 ‘피카소어린이미술관’에는 피카소 진품이 전시돼 있다. 피카소가 1941년에 제작한 작품 ‘앉아 있는 여인’. 박미향 기자 |
‘가나아트파크’ 야외 공간. 박미향 기자 |
장흥에 있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야외 풍경. 박미향 기자 |
‘송암스페이스센터’에 있는 우주 영상 상영관 플라네타리움을 밖에서 본 모습. 플라네타리움은 천체를 투영하여 상영하는 돔형 극장을 말한다. 박미향 기자 |
인근에 있는 ‘송암스페이스센터’는 특이한 여행지다. 평일엔 단체 관람객만 받는다. 토요일 오후만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안내서엔 ‘체험 위주 우주테마파크’라고 적혀 있다. 2007년 문 연 이곳에는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가 있다. 입체동영상관 ‘플라네타리움’에선 밤하늘 별 이야기를 상영한다. 미국의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1934~1996, ‘코스모스’ 저자)이 남긴 글이 들머리에 걸린 사진에 적혀 있다. ‘이 광대한 우주 무한한 시간 속에서 당신과 같은 시간, 같은 행성 위에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여운이 길게 남는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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