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여기, 사람이 있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한겨레
원문보기

여기, 사람이 있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서울맑음 / -3.9 °



정릉골 풍경. 필자 제공

정릉골 풍경. 필자 제공


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서울살이 10년 차를 넘긴 지 제법 됐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한해, 한해를 보내다 보면 20년도 눈 깜짝할 사이일 것 같다. 자취방에서부터 신혼집까지, 이사를 대략 일곱번은 한 것 같다. 보증금 100만원에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던 마포구 염리동 월세방을 시작으로 온갖 동네들을 전전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반지하, 옥탑을 가리지 않았다. 저렴한 동네는 어김없이 재개발 지역 딱지가 붙어 있었고, 부동산 사장님한테 얼마나 살 수 있냐고 물어보면 ‘학생 살 동안에는 아무 일 없어’라는 얘기를 인사처럼 듣고 지냈다. 정말이지 그랬다. 재개발 삽 뜨기 전에 내가 먼저 동네를 떠야 했고, 그렇게 서울 곳곳 언덕배기 가난하고 정겨운 동네에 일이년짜리 짧은 둥지를 틀며 살았다. 그렇게 십년쯤 지나니 살던 동네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많던 가난한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이 과연 재입주할 수 있을지 의문인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권사님이라 불리길 원하셨던 옥탑방 집주인 할머니는 언젠가 개발되면 시골 가신다 했는데, 바로 얼마 전 그 집이 철거된 걸 보며 안부 물을 길 없으니 그저 잘 사시겠거니 했다. 그 집 앞 백반집이 좋았다. 아주머니 두어분이 일하며 매일 반찬이 바뀌는 그런 집. 상호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백반집으로 부르던 집들이 몇개 있었고, 그중 내 단골집은 조그마한 뚝배기에 끓여 나오는 1인분 닭도리탕이 맛있었다. 점심 장사 끝나고 때 놓쳐 오후 늦게 밥 먹는 이들의 드문 발길도 잦아들면 빈 반찬통을 들고 온 학생 두어명이 가게의 마지막 식사를 한다. 오랜 단골인지, 사장님은 익숙한 듯 몇마디 건네며 반찬통에 그날 남은 반찬들 몇가지를 싸주셨다. 일주일에 한번은 꼭 가던 내게는 반찬통 얘기 한번 안 하시길래, 한동안 내 목표는 반찬통 지참을 허락받는 일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이사를 해야 했지만.



집값 저렴한 동네는 투기꾼들에게는 목 좋은 상품이겠지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곳이다. 한탕 벌어보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장사도 어렵고, 일상도 피곤한 곳. 드라마처럼 살가운 것은 아니고, 가끔은 좁은 동네 살 부대끼다 고함도 몇번 오가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기분이 드는, 길고양이들 살기 좋은 그런 곳이다.



정릉골 풍경. 필자 제공

정릉골 풍경. 필자 제공


정릉동 757번지, 이 길이 맞나 싶은 자그마한 도로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정릉골이 나온다. 1960년대 초 청계천 일대 판자촌 철거로 이주하게 된 이들이 북한산 자락에 형성한 달동네다. 이주 대책도, 수용 대책도 없는 재개발에 외부 투기꾼들이 들어와선 으름장을 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개발 소식에 많은 주민이 떠나야 했지만, 마을 광장에는 공동 텃밭이 아직 잘 관리되고 있었다. 조용히 살펴만 보고 가려는데, 예전에 상가 세입자 투쟁을 하며 알게 된 한 주민과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렸다. 도시의 인연은 어째 얄궂기만 하다.



정릉골 풍경. 필자 제공

정릉골 풍경. 필자 제공


“전도사님, 여기가 우리 마을이에요.”



떠난 사람들 원망 않고 마음 굳게 먹은 주민들이 가족처럼 어울려 지내며 텃밭이며 골목이며 가꾸고 투쟁에 나서고 있다. 고급 타운하우스를 짓는다느니,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느니 화려한 계획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동안 주민들은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사라질 동네라며 촬영 오는 사람도 여럿이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는 풍경이 아니며, 여전히 여기, 사람이 있다.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