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트럼프 100일, 미국을 '위태'하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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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달걀 파동 당시 미국 뉴저지주 유통매장 홀푸드의 달걀 판매대가 텅 비어 있다. /사진=심재현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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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심재현 특파원 |
"올초엔 달걀만 그랬는데 이젠 다 오른다."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州) 할인매장 '타깃'. 세제 판매대 앞을 서성이던 한 여성 고객이 5달러(약 7200원)짜리 세제와 5.5달러(약 7900원)짜리 세제를 번갈아 들어보다 읊조리듯 이렇게 내뱉었다. 매장을 찾은 다른 이들도 물건을 마음 편히 고르진 못하는 눈치였다. 판매대 위에 진열된 상품을 살듯 말듯 만지작거리다 빈 손으로 가게를 나서는 이도 있었다.
매장 앞 주차장에서 만난 제이콥씨는 "대통령이 바뀌면 '별로 산 것도 없는데 100달러' 같은 말은 안 하게 될 줄 알았다"며 "이젠 다들 초과근무를 더 하는 것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열흘 만에 장을 보러 왔다는 스테이시씨는 "관세가 모든 걸 망치고 있다"며 "고깃값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질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 채식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라는 구호를 내걸고 취임한 지 30일로 만 100일을 맞는 가운데 미국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호언장담과 달리 트럼프표 정책의 역풍이 오히려 무역 의존도가 높은 미국 경제를 강타하면서 생활 패턴과 식단을 바꾸는 이들까지 나온다.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가 금융중심가 월가의 발빠른 경고음만큼 일상을 빠르게 잠식한 상황은 아니지만 심상치 않은 민심 이반이 감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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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형할인매장 타깃에서 장을 본 사람들이 매장 밖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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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주 코스트코 매장. /사진=심재현 특파원 |
미국 소비자들이 가장 배신감을 느끼는 지점은 바로 물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취임 첫날부터 물가를 끌어내리겠다고 공언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물가 폭등에 질렸던 유권자들은 반쯤은 속는 셈치고 표를 몰아줬다. 하지만 물가는 여전히 꺾일 줄 모른다.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미국에서 급격한 물가 상승은 더 치명적이다. 설상가상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저축 잔고가 이미 바닥 수준인 가구가 적잖다. 스테이시씨는 "관세든 뭐든 먹고사는 문제를 건드렸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난제"라며 "물가를 잡고 일자리를 늘린다고 해서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찍었던 사람들도 1달러, 50센트를 아까워하게 되는 상황은 예상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판 1000원숍'으로 불리는 달러 제너럴(DG)의 주가가 날아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지난 26일 찾은 DG 매장에는 토요일 휴일인데도 물건을 사러온 이들이 북적였다. 매장 직원은 "가격이 저렴한 제품은 대부분 수입산인데 (관세정책으로) 물건 값이 오를 수 있다고 하니까 미리 사두려는 사람들과 좀더 저렴하게 사려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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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1000원숍' 달러제너럴(DG) 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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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주 한인마트. /사진=심재현 특파원 |
각종 지표에는 아직 확실하게 잡히지 않지만 현지에서 체감하는 물가 상승과 소비 위축은 이미 소비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 근교 한인 밀집지 둘루스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태산씨(가명)는 "생활이 팍팍해지면 제일 먼저 티 나는 게 외식을 줄이는 것"이라며 "이달 들어 가게 매출이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 식당처럼 수입산 식자재 비중이 큰 곳은 관세 타격이 곱절이다. 김씨는 "손님은 줄어드는데 한국산 수입 식자재 가격은 올라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관세가 온 나라를 뒤집어놓으면서 틈새 수혜를 보는 곳도 있다. 미국의 대표 중고거래업체 스레스업은 올 들어서만 주가가 200% 넘게 뛰었다. "미국 가정의 옷장에서 나온 중고 의류와 가방은 관세 정책의 무풍지대"라는 말이 나온다.
이달 3일부터 수입차 25% 관세가 시행되면서 중고차 시장도 뜨겁다. 중고차 가격이 신차 가격을 따라잡은 사례도 여럿 보인다. 중고차거래업체 카맥스 직원은 "주요 자동차업체가 올 여름 차값 인상을 예고하면서 아직 가격 인상 전인 신차 가격에 육박하는 중고차 매물이 나오고 있다"며 "연식에 비해 싸게 나온 차량은 순식간에 팔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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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고차매장 카맥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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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주 월마트 매장. /사진=심재현 특파원 |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트럼프 대통령의 첫 100일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중 최저라는 여론조사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앞마당에 여전히 '도널드 트럼프,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팻말을 꽂아놓은 집이 적잖지만 주말이면 미국 전역에서 조직적인 반트럼프 집회가 잇따른다. 지난 19일 뉴욕 맨해튼에서 진행된 집회엔 "트럼프 대통령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나름의 '충언파'가 있었던 1기 때와 달리 2기 행정부에선 충성파에 둘러싸인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구호다.
뉴욕타임스가 시에나대와 함께 지난 21~24일 미국 유권자 91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6%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도를 넘었다"고 답했다.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관세를 부과해선 안 된다는 답변은 61%에 달했다. 부정적인 여론 탓인지 백악관에서도 최근 일부 관세 완화 신호가 흘러나온다. 백악관은 오는 29일 자동차 관세 완화 조치를 발표할 예정이다.
하지만 지난해 대선부터 "관세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주장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정책을 전면 포기할 가능성은 여전히 극히 낮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도 "관세가 부과되면 많은 사람들의 소득세가 크게 줄어들거나 완전히 면제될 수 있다"고 관세정책을 '셀프 홍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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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지난 19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 참가자가 등에 맨 팻말에 '트럼프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심재현 특파원 |
뉴욕=심재현 특파원 urme@mt.co.kr 애틀랜타(미국)=기성훈 기자 ki030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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