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100일] ‘소통’ 포장된 ‘홍보’
군소 매체 밀물로 침범된 ‘엘리트 성역’
언론 비판 줄이는 의도적 정부 ‘물갈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100일을 닷새 앞둔 24일(현지시간) 오후 미 워싱턴 백악관 웨스트윙(서관·집무동) 1층 제임스 S 브래디 브리핑룸. 이날은 요나스 가르 스퇴르 노르웨이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외신(노르웨이)까지 포함해 평소보다 규모가 커진 풀기자단(백악관공동취재단)이 투입돼, 많은 기자들이 자리했다.
알록달록한 옷을 차려입은 기자 여럿이 눈에 띄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회색 정장과 실용적인 플랫슈즈가 대세인 이곳에서 화려한 넥타이와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이들은 대부분 트럼프 행정부가 출입을 허용한 새 얼굴들이다. 비교적 젊고 보수적이다.
원래 이곳은 얼마간 엄숙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언론·정부 엘리트들의 공간이다. 출입 자격을 얻기가 까다로워 일종의 성역으로 통했다. 질문을 통해 정부 잘못을 드러내 알리고 비판을 가하는 게 언론의 전통적 본령이다. 민간 메신저 시그널을 통한 군사 기밀 유출 의혹 사건인 ‘시그널 게이트’ 이틀 뒤 열린 지난달 26일 대변인 브리핑에서는 불편한 질문이 쏟아졌다.
군소 매체 밀물로 침범된 ‘엘리트 성역’
언론 비판 줄이는 의도적 정부 ‘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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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라인 레빗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 15일 워싱턴 백악관 제임스 S 브래디 브리핑룸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중앙 49개의 좌석은 매체가 지정돼 있다. 주로 주류 언론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신설된 2개의 단상 오른쪽 뉴미디어석 주변은 친트럼프 군소 매체 기자들이 자리해 ‘보수 코너’(conservative corner)로 불린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100일을 닷새 앞둔 24일(현지시간) 오후 미 워싱턴 백악관 웨스트윙(서관·집무동) 1층 제임스 S 브래디 브리핑룸. 이날은 요나스 가르 스퇴르 노르웨이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외신(노르웨이)까지 포함해 평소보다 규모가 커진 풀기자단(백악관공동취재단)이 투입돼, 많은 기자들이 자리했다.
알록달록한 옷을 차려입은 기자 여럿이 눈에 띄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회색 정장과 실용적인 플랫슈즈가 대세인 이곳에서 화려한 넥타이와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이들은 대부분 트럼프 행정부가 출입을 허용한 새 얼굴들이다. 비교적 젊고 보수적이다.
앉은 기자와 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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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동인 웨스트윙(서관). 브리핑룸은 1층에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
원래 이곳은 얼마간 엄숙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언론·정부 엘리트들의 공간이다. 출입 자격을 얻기가 까다로워 일종의 성역으로 통했다. 질문을 통해 정부 잘못을 드러내 알리고 비판을 가하는 게 언론의 전통적 본령이다. 민간 메신저 시그널을 통한 군사 기밀 유출 의혹 사건인 ‘시그널 게이트’ 이틀 뒤 열린 지난달 26일 대변인 브리핑에서는 불편한 질문이 쏟아졌다.
캐럴라인 레빗 대변인이 기밀이 공유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을 폭로한 시사잡지 애틀랜틱 편집장을 반(反)트럼프 인사로 매도하자 기자들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피트 헤그세스(국방장관)가 쓴 글이 기밀이 아니라고 하는 근거가 뭐냐”(NBC뉴스). “누가 조사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혀 달라”(뉴욕포스트).
호명된 9명 중 8명이 게이트에 관해 물었고 모두 브리핑룸 고정 좌석 보유 매체 소속이었다. 유일하게 게이트와 무관한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단상 오른편에 서 있던 친(親)트럼프 방송 린델TV 기자 카라 카스트로누오바였다.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투표 방식 개정에 민주당은 왜 반대하느냐는 ‘정부 편들기’ 질문을 했다.
친트럼프에 발언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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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브리핑룸 뒤편 기자실 초입에 “우리는 AP(통신)와 함께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다. 백악관 대변인실은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바꿔 부르라는 행정명령을 AP가 따르지 않자 백악관 집무실과 대통령 전용기 출입을 금지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
이런 효과를 노려서일까. 트럼프 백악관 대변인실은 브리핑룸 주류의 ‘물갈이’를 시도하고 있다. 1월 독립 언론인과 팟캐스터, 인플루언서(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유명한 사람), 콘텐츠 제작자 등에게 백악관을 개방하고 단상 오른편에 뉴미디어석 의자 2개를 추가했고, 2월에는 백악관출입기자협회(WHCA)로부터 풀기자단 선정 권한을 빼앗았다.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바꿔 부르라는 행정명령을 AP통신이 따르지 않자 백악관 집무실과 대통령 전용기 출입을 금지했다. 지금은 브리핑룸 49개 좌석 배치도 직접 통제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현재 맨 앞줄은 단상 왼쪽부터 CNN방송, 로이터통신, ABC뉴스, AP, CBS뉴스, 폭스뉴스, NBC 자리다.
요즘 일부 기자는 뉴미디어석 주변을 ‘보수 코너’(conservative corner)라 부른다.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의 트럼프 선거 구호) 친화적인 군소 보수 매체 기자들이 브리핑 때마다 거기에 모여 서 있어서다. 레빗 대변인은 마가로 묶여 불리는 이들에게 자주 발언권을 부여하는데 대개 첫 질문도 그들 차지다.
24일은 브리핑이 없었다. 하지만 도처에 마가였다. 이들이 보기에 주류 매체는 국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주목을 끌어 자사의 상업적 이익에만 충실한 기득권층의 한 축일 뿐이다. 이런 위화감 해소에 나선 대통령이 트럼프다. 린델TV 카스트로누오바의 동료인 기리시 가우르는 한국일보에 “미디어가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게 옳은 보도가 필요하다. 이제 사람들은 뉴욕타임스(NYT)가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접속한다”고 말했다.
비판이 특권? 위축되는 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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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브리핑룸 앞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우파 라디오 방송 리얼아메리카보이스의 백악관 출입기자 브라이언 글렌.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
마가는 주류 언론 견제 세력이라는 게 이들 인식이다. 우파 라디오 방송 리얼아메리카보이스의 브라이언 글렌은 본보와 만나 “마가 영향력이 더 커진 것은 분명하다”며 “기존 언론이 현재 상황을 공정하게 보도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렌은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 마저리 테일러 그린의 남자친구로, 2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왜 정장을 입지 않았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직접 소통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상 이들의 기능은 정권 홍보다. 매체를 운영하는 우파 청년단체 터닝포인트USA의 모니카 루이지는 본보 인터뷰에서 “미국 국민을 대신해 질문할 수 있어 기쁘다. 그들이 궁금한 것은 교도소 시스템이나 불법 체류자 처우가 아니라 은행 계좌나 생필품 가격, 지역 안전 같은 것”이라며 “백악관이 자기들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아는 것은 미국 국민에게 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자꾸 압박당하거나 배제되다 보니 주류 언론은 위축된 기색이다.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한 마가 기자들과 달리 “바쁘다” “회사와 협의해야 한다”며 거부하기 일쑤였다. 대통령과 그를 조롱하는 코미디언이 참석해 해마다 주목받는 사교 모임인 백악관출입기자단 만찬도 올해는 26일 트럼프 대통령과 레빗 대변인 모두 불참한 가운데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고 NYT가 27일 전했다. WHCA 회장 유진 대니얼스는 이날 연설에서 “우리는 시험받고 있으며 공격받고 있다. 언론인들이 매일 아침 백악관으로 달려가는 것은 권력자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단 하나의 사명 때문”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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