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조위 청문회’ 열렸지만
해경·해수부 고위직 “모른다” 일관
‘세월호 의인’ 화물기사 울분 자해도
정부, 1년6개월 뒤 특조위 강제종료
주검 인도 민간 잠수사 트라우마 고통
신체·정신적 고통에 생계마저 망가져
‘최순실 국정개입’ 스모킹 건 보도되자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 퇴진 투쟁 열기
집회 때마다 세월호 실종자 9명 호명
12월3일 마침내 200만 인파 청와대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 이틀째인 2015년 12월15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질의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의 화면은 세월호 사고 당시 진도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침몰 현장에서 만난 실질 잠수 인력이 500명이라는 보고와 달리 2명에 불과했다’는 유가족 항의에 “그럴 리가 없다”며 김석균 당시 해양경찰청장을 두둔하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2015년 12월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명동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대강당에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1차 청문회가 열렸다. 이날 청문회에는 해양경찰청 지휘부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참석했고, 수감 중이던 이준석 세월호 선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의 핵심 증인들이었지만, 대부분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 성의 없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이런 모습에 울분을 참지 못한 세월호 의인이자 생존 화물기사 김동수씨가 자해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때 참석한 김관홍 잠수사는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는지….” 단원고 희생자 정동수군의 아버지 성욱씨는 해경으로부터 받았던 아들의 주검 사진을 공개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유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울었다. 그 뒤로 2016년 3월과 9월에 2차, 3차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 때마다 일부의 사실들이 새로 확인되는 성과가 있었다.
2015년 12월16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 세번째 날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청문회가 열리는 장소 밖에는 어버이연합, 의혈단, 고엽제전우회와 같은 극우 성향 단체들이 극성맞게 방해 시위를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당시 박근혜 청와대가 전국경제인연합(현 한국경제인협회)의 돈으로 68억원을 이들 단체에 지원했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 이틀째인 2015년 12월15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과 세월호 사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모른다” 일관한 청문회 고위직 증인들
선체 인양도 신뢰할 수 없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인양 업체인 ‘상하이 샐비지’의 공법 자체도 문제였는데 두차례 인양 시도를 하다가 선체에 걸었던 쇠줄이 파고 들어가 선체만 훼손하고 실패했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침몰 현장이자 인양 작업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동거차도 산등성이에 감시초소를 만들었다. 마을에서 지게로 물과 먹을 것을 지고 오르내렸다. 이 감시초소는 세월호가 인양될 때까지 유지됐다.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감시초소를 지켰고, 가끔 나를 비롯한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4·16연대) 회원들이 합류해서 밤을 지새웠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소형 선박을 사들여서 ‘진실호’라 명명하고, 수시로 세월호 인양 작업을 하는 곳에 나가서 감시했다.
이렇게 피해자들이 감시하는 것을 알게 된 상하이 샐비지는 어떻게 하든 작업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썼다. 낮 시간은 피하고, 밤에 작업을 하거나 큰 선박과 구조물로 현장이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세월호 참사는 매 순간 감추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긴장된 싸움의 연속이었다. 4·16연대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와 함께 “감추는 자가 범인이다”라는 말로 정부를 규탄하는 행동을 이어갔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20대 총선이 2016년 4월13일에 열렸다. 더불어민주당이 223석을 차지해서 제1당이 되었다. 총선에 출마한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씨는 서울 은평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초기부터 유가족들과 함께했다. 그런 박 변호사를 신뢰했고, 총선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단원고 희생자 오영석군 아버지 병환씨는 큰 곰인형을 쓰고 그의 유세를 도왔다. 민간 잠수사 김관홍씨는 박 변호사의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김관홍씨는 세월호에서 292구의 시신을 수습한 25명의 민간 잠수사 팀의 일원이었다. 민간 잠수사들은 무리한 잠수로 골괴사(혈액 공급이 부족해서 뼈가 죽는 질환)를 앓고 있었다. 부상이 없다고 해도 트라우마로 인해서 일하기 힘들었다.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을 한명 한명 가슴에 안아 올려서 수습했던 잠수사들은 “우리 딸들, 아들을 안고 싶어요. 그런데 안 돼요” 하고 괴로워했다.
김관홍씨도 대리기사 일로 생계를 위한 일을 했지만, 불면증에 시달렸고, 자꾸 술에 의존했다. 그는 일 못 하는 잠수사들을 위해서 수영강습이나 물놀이 안전교육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송경용 신부의 소개로 김영배 성북구청장(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만나서 이런 문제를 상의했다. 김 구청장이 구청이 운영하는 수영장 등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는 너무 좋아하면서 내게 “형님은 슈퍼맨”이라고 치켜세웠다.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김관홍 민간 잠수사가 2015년 12월16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트라우마 고통’ 잠수사 김관홍의 죽음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다(2016년 6월17일).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장례식장에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의 딸들과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한 그의 아들을 보았다. 너무 서러웠다. “관홍아, 네가 술 사달라고 했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뤘는데, 이렇게 떠나면 어떡하냐”고 울어야 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내 심장에 아픈 이름 하나를 다시 새겨야 했다.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 활동기한이 1년6개월이므로 조사는 2016년 6월30일로 종료하겠다면서, 9월30일까지 사무실을 비우라고 통보했다. 이에 항의해서 이석태 위원장을 비롯한 특조위 위원들이 광화문 4·16 광장에 단식 농성을 벌이며 항의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 문을 강제로 닫게 했지만, 곧바로 침몰해 갔다.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졌던 백남기 농민이 2016년 9월25일 사망했다. 뇌수술을 받았지만, 317일 만에 결국 돌아가셨다. 물대포에 따른 뇌손상인 것이 너무도 확실함에도 검찰은 강제부검을 시도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시민들과 농성을 벌이며 이를 막아냈다.
그해 10월로 넘어오면서 박근혜 정부는 위기에 몰렸다. 여기저기서 퇴진 얘기가 나왔다. 그러다가 10월25일, 제이티비시(JTBC)가 국정 개입을 입증할 ‘스모킹 건’이었던 최순실(개명 최서원)씨의 태블릿 피시(PC)를 공개했다. 박근혜 정부 내 국정농단이 한순간에 드러났다. 정국은 급물살을 탔다. 10월29일 비가 내리는 청계광장에 3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렸고, 그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진출했다. 박근혜 퇴진 투쟁 1차 집회였다. 1주일 뒤인 11월5일에는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에 이어서 2차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 30만명이 운집해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11월9일 ‘박근혜퇴진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이 전국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출범했다. 나는 4·16연대의 대표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퇴진행동 50인의 공동대표였고, 나중에는 5인의 상임대표가 되었다. 여론은 하야에서 퇴진으로 그러다가 탄핵으로 급진전하였다. 주저하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정당들도 이런 흐름을 반영해서 탄핵으로 가닥을 잡았다.
‘박근혜 즉각 퇴진 6차 촛불집회’가 열린 2016년 12월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신교동교차로에 모인 시민들이 저녁 7시가 되자 ‘저항의 1분 소등’에 동참해 촛불을 모두 끈 채 앉아 있는 동안 생방송 중계를 위한 조명이 들어와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탄핵 광장서 잠시 촛불 끈 이유
매주 토요일이면 광화문에 장엄한 촛불 바다가 펼쳐졌다. 겨울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민들이 모였다. 광화문 광장 북단에 중앙무대가 설치되었지만, 남대문, 서울역까지 스크린과 스피커를 설치했다.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외치는 퇴진 집회의 열기는 한겨울의 추위도 녹일 정도였다. 그 집회의 사회는 주로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가, 윤희숙 청년연대 활동가가 맡았다. 그들은 ‘천만 사회자’라고 불렸다.
유명 가수들이 자발적으로 무대에 올라서 노래했다. 시민들도 앞다투어 발언을 신청했다. 나는 가급적이면 운동단체 사람들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발언 기회를 많이 주자는 입장이었다. 규격화되어 있는 활동가들의 말보다 시민들의 발언이 훨씬 더 생동감이 있었고, 그런 만큼 감동과 호응도 컸다. 워낙 많은 단체와 시민들이 발언하려고 몰리는 상황이라서 설득하고, 조정할 일이 많았다.
매번 집회 때마다 저녁 7시만 되면 촛불을 껐다. 침묵 속에서 그때까지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실종자 9명의 이름을 불렀다. 1분 동안의 어둠 뒤에 다시 촛불을 켜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노래와 함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에 나섰다. 행진 대오 맨 앞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자리를 잡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의 얼굴 사진이 박힌 현수막을 들고 걸었다. 그것만으로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이 있었고, 시민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매번 선두는 세월호 가족들이었다.
2016년 12월3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 ‘촛불의 선전포고-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집회에 참가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종로구 청운동 청와대 앞 100m에 닿아 경찰 차벽 앞에서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12월3일, 전국에서 232만명이 모였다. 광화문에만 2백만명이 운집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집회였다. 매번 퇴진 집회 때마다 청와대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다가 이날은 드디어 청와대 앞 100m까지 들어가 앉았다. 엄마들이 울부짖었다. 박근혜를 만나겠다고 오려고 할 때마다 경찰에 의해서 막히고, 패대기쳐지던 일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인권운동을 해온 나로서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시민들의 힘으로 우리의 권리를 확보한 날로 기억한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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