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100일] [1] 車공장 밀집 코코모市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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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미국 인디애나주 코코모의 스텔란티스 공장 전경. 교대 근무를 마치고 나온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있다. /박국희 특파원 |
미국 인디애나주(州) 인디애나폴리스 공항에서 옥수수밭 사이를 한 시간 넘게 달려 인구 6만여 명의 소도시 코코모(Kokomo)에 지난 23일 도착했다. 코코모엔 제네럴모터스(GM)·포드와 함께 미국 자동차 시장 ‘빅3’로 불리는 스텔란티스 공장이 있다. ‘코코모 변속기 공장’이란 간판이 붙은 건물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녹슨 물탱크였다. 공장 출입구 인터폰엔 ‘고장(Out of order)’ 안내문이 덜렁거렸다. 이곳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일자리를 돌아오게 하겠다”면서 지난해 선거 때 유권자를 공략한 러스트벨트(중부 제조업 쇠락 지역) 지역에 속해 있다. 그는 인디애나에서 58%를 득표했다.
스텔란티스 공장 주차장에서 만난 멜리사씨는 “트럼프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해 표를 준 직원들이 (해고돼) 집에 있다. 일단은 2주간이라고 들었지만 기간이 더 연장된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스텔란티스는 자동차 부품 관세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자 지난 7일 900여 명을 일시 해고했다. 코코모에서만 약 4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29일은 트럼프 ‘2기’ 취임 100일째 되는 날이다. 임기 중 추진할 의제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는 ‘첫 100일’을 미국에선 중요하게 여긴다. 트럼프는 전방위적으로 관세를 부과하고 연방 정부를 구조조정하면서 ‘나는 다르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무역 의존도가 높은 미국 경제가 벌써 관세의 역풍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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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애나주 코코모의 자동차 기업 스텔란티스 공장 출입문 인터폰에 '고장' 안내문이 반쯤 떨어진 채 붙어 있다. 출입구 안으로 노동자들이 이동식 카트를 타고 있는 모습. /박국희 특파원 |
◇“美 제조업 부흥? 트럼프 찍은 직원들, 해고돼 집에 있다"
트럼프의 주장대로라면 코코모는 트럼프의 전방위적 관세로 공장이 세워지고 일자리가 늘어 경제가 부활해야 하는 도시다. 유권자들은 이런 기대를 가지고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줬지만 이날 만난 주민 중에 유세 때처럼 트럼프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이가 드물었다. 트럼프가 부과하겠다고 밝힌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에 대한 높은 관세는 일자리를 늘리기는커녕 실업자만 늘릴 판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스텔란티스 공장에서 13년 동안 일했다는 멜리사씨는 “관세가 미국으로 일자리를 되돌린다는 트럼프의 거짓말에 우리가 속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 3일부터 모든 수입차, 다음 달 3일부터는 모든 수입차 부품에 관세 25%를 부과(캐나다·멕시코산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부품 관세가 올라가면 수입 부품을 들여와 차를 생산하는 미국 내 공장은 비용이 불어나게 된다. 자동차 업계 우려가 커지자 트럼프는 지난 14일 부품 관세 유예를 시사했는데,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이런 오락가락하는 행태 또한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악재라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크라이슬러·지프 등을 생산하는 스텔란티스는 지난 7일 미국에서 900명을 일시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산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중 한국·일본·중국·유럽 등 비(非)북미산 비율이 60%에 달하다 보니, 관세 인상의 영향에 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한 결과다.
전미자동차노조(UAW) 코코모 지부에서 만난 제이슨씨는 “일시 해고돼 실업 급여를 신청하러 노조 사무실에 들렀다”고 했다. 11년간 스텔란티스 공장에서 일했다는 그는 “조 바이든(전 대통령)이 싫어 트럼프를 지지했다. 그런데 우리가 트럼프 관세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섯째이자 막내딸이 최근에야 독립해 집수리를 했다는 제이슨씨는 “이번 해고가 영구적이 될까 봐 걱정된다. 전에는 배관 일을 했는데 나이가 든 지금 하기에는 버겁다”며 한숨을 쉬었다. “트럼프 관세가 노동자를 도와주기보다 피해를 주고 있지 않습니까. 스텔란티스가 잘못되면 코코모는 유령 도시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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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제조업의 성지로 불렸지만 지금은 쇠락해 '러스트 벨트'의 상징적인 곳으로 꼽히는 미국 인디애나주 코코모 도심의 낙후된 모습. 왼쪽부터 폐업한 채 방치돼 있는 주유소, 매물로 나온 공실 상가, 유리창이 깨져 있는 폐공장. /박국희 특파원 |
코코모의 지금 모습을 보니 그의 한탄이 기우(杞憂)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스텔란티스는 지난해에도 경영 악화를 이유로 코코모 노동자 400여 명을 해고했다. 공장 노동자들이 다른 일감을 찾아 떠나면서 코코모 상권은 이미 붕괴가 시작됐다. 길가엔 폐업한 주유소가 계속 보였다.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돼 있는 폐공장과 창고도 많았다. 주민들은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코코모를 부활시키기는커녕 더 끌어내릴지 모른다며 초조해했다.
전미자동차노조 코코모 지부 데니 버틀러 부회장은 “나는 정치가 정말 싫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매일 공장에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정치적 결정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그는 ‘공장을 미국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트럼프의 약속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고 했다. “기업들이 다른 나라에서 철수해 (코코모) 옥수수밭 한복판에 새로운 공장을 바로 세운다고요? 현실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이런 즉흥적인 발표만 하지 말고 (지역사회를 위한)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정부와 회사가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노조 게시판엔 조합원의 자녀를 대상으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 소식이 걸려 있었다. 장학금 2000달러를 내건 글짓기 주제는 ‘수입 제품에 대한 관세가 미국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장기적 영향’이었다. 노조 관계자는 “관세는 코코모의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라며 “노동자와 가족들도 관세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고 행동해야 한다는 취지로 글짓기 대회 주제로 정했다”고 했다.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아직 초기이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스텔란티스 공장에서 일한 지 2년 됐다는 한 트럼프 지지자는 “우리 모두는 미국 제품을 미국에서 만들기를 원할 뿐”이라며 “관세가 당신네 나라(한국)나 중국에 좋지는 않겠지만 미국 자동차 공장은 모두 미국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30년째 공장에서 일한다는 브라이언씨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반년간 일시 해고됐다가 결국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트럼프의 관세가 잠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TSMC나 현대차 등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호응해 미국에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있지만, 이런 ‘호재’가 중부 러스트벨트가 아닌 남부 주들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도 코코모 주민들에겐 불편하게 느껴지는 변화다. TSMC 공장은 애리조나, 현대차의 새 자동차 공장과 제철소는 각각 조지아와 루이지애나에 세워진다. 고든 핸슨 하버드 케네디스쿨(경영대학원) 교수는 “인디애나·미시간 같은 기존 자동차 산업 중심지는 강성 노조의 힘이 세기 때문에 트럼프의 압박으로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들은 이 지역을 피하려고 한다. 공장이 돌아오더라도 결국 트럼프에게 표를 주었던 러스트벨트 주민들이 아닌, 남부 지역 사람들이 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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