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이 만난 사람] 제3의 노동운동 ‘한국노동재단’ 송경용 신부와 이미영 대리기사
◇노동 약자들의 길동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양분한 노동계에서 지난 1월 한국노동재단이 출범했다.
“한국 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불안정 고용 노동자, 2차 시장 노동자들이 시민사회 일원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길동무가 되고자 한다.”
-‘12대88’로 상징되는 ‘노조 밖 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인가?
“12대 88로 도식화하고 싶지 않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나 리프트가 생기면 누가 편한가? 노인, 장애인뿐 아니라 임산부, 장바구니를 든 주부, 발을 다쳐 깁스를 한 청년 등 모든 사람이 편해진다. 약자를 위한 시스템은 사회 전체의 안전망이 된다.”
-‘제3의 노동운동’이라고 한다.
“다양성으로 봐달라. 몸집 큰 노총이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이 차별 받지 않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노동의 본원적 가치를 회복시키겠다고 했다.
“노동은 단순히 임금, 연봉으로만 계산될 수 없다. ‘얼마짜리 노동이냐’로 계급화해서는 사회가 건강해질 수 없다. 노동에 상하(上下)는 없다. 하청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 가치를 인정하고 호명해줘야 한다.”
-투쟁보다 자조(自助), ‘공제(共濟)’를 강조하더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 단체 이름이 ‘조선 노동 공제회’였다. 19세기 영국에서도 노동운동은 협동조합 등 노동자들이 서로의 생활과 자립을 돕는 공제로 시작됐다. 그런데 한국 노동운동은 민주화·반독재 투쟁과 결합되면서 ‘전투적 노조주의’로 흘렀다. 그 속에서 노조 바깥에 있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소외됐고 이중 구조가 가속화했다.”
-노사, 진영, 이념을 넘어서겠다고 했다.
“정치, 경제, 노동, 교육, 저출산 등 한국 사회 모든 문제는 이제 어느 한 진영에서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재단도 경영계, 학계, 시민단체, 일반인이 고루 참여한다.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다.”
-후원 회원은 현재 얼마나 되나?
“석 달간 350명이 등록했다. 더 많은 분이 함께해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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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나눔하우징’을 이끌었던 송경용 신부가 서울 은평구의 한 연립주택에서 도배를 새로 하고 창틀을 걸고 있다. 빈민운동의 대부인 그는 협동조합, 사회연대기금을 만들어 사회적 경제 운동을 펼쳐왔다. /조선일보DB |
◇ 거리의 神父, 송경용
-재단 설립을 주도한 한석호 전(前) 전태일재단 사무총장과는 어떻게 알게 됐나?
“노동운동의 ‘수괴’였으니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는데, 2017년인가, 그가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을 성찰해야 한다고 외쳤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천만 명이 넘는 하청·비정규직·플랫폼·일용직 노동자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더라. 내가 40년 빈민운동을 하며 기다려온 인물이 드디어 나타난 거였다(웃음).”
-무슨 뜻인가?
“90년대 초 산업 구조가 개편되고 고도화되면서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건설·봉제·탄광 노동자들이 빈민촌으로 밀려들어왔다. 한때는 수출 역군이었던 그들이 빈곤의 악순환 고리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대기업 노조를 설득해 ‘1노조 1마을’ 운동을 펼쳤다. 협동조합, 사회연대기금을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고 자립을 도왔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한석호와 의기투합했나?
“만나자마자 사고를 쳤지(웃음). 버스비로 배곯는 미싱사와 시다에게 풀빵을 사서 먹이고 자기는 집까지 걸어갔던 ‘전태일 정신’에 기반해 ‘노동공제연합 풀빵’을 만들었다.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을 위한 상부상조, 사회적 연대의 출발이었다.”
-한석호가 조선일보와 공동기획한 ‘12대88의 사회를 넘자’ 시리즈로 민노총에서 비난받을 때 그를 온몸으로 방어했더라.
“돌멩이를 너무 맞다가 죽을까 봐(웃음). 진보와 보수, 정부와 언론이 다같이 숙고하고 토론하면서 풀어가야 할 문제인데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공격하는 모습이 슬프고 답답했다.”
◇예수도, 부처도 가난한 이들과 걸었다
-별명이 ‘거리의 신부’다. 2010년 1월 ‘걷는 교회’를 만들고 첫 미사를 집전했다.
“예수도, 프란치스코도, 부처도, 해월 선생도 모두 걸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성공회 소속 신부인데 시무하는 교회 건물이 따로 없나?
“내겐 세상 모든 곳이 교회다. 재해, 참사 현장 등 위로와 기도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새들이 성가대이고, 나무와 꽃들도 함께 예배드린다.”
-성공회 나눔의 집을 중심으로 빈민, 장애인, 노숙자들의 자립을 돕는 일에 헌신해왔다.
“기도만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웃음). IMF 터진 뒤로는 하루 잠을 2~3시간밖에 못 잤다. 주민들이 언제 우리를 부를지 모르니 후배 사제들에게도 머리맡에 전화기를 두고 자라고 했다. 잠자는 사제에게 찬물을 끼얹은 적도 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쿨쿨 자고 있으니(웃음).”
-직장 내 괴롭힘인데.
“산동네에선 새벽 5시만 되면 계단을 다다다다 뛰어내려 가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성직자라면 새벽 시장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발소리에 눈이 떠지고 심장이 뛰어야 한다고 호통쳤다(웃음).”
-연세대 건축학과에 다니다 성공회대로 편입했다.
“나 또한 청소년기에 극도의 가난을 겪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호떡 장사, 배추 장사, 신문팔이 등 안 해본 게 없다. 대학에서 야학을 하면서 빈민들 삶에 뛰어들었다. 상계동 빈민촌이 철거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기도한 것이 운명이 됐다. ‘나눔의 집’의 시작이었다.”
-그냥 건축가가 됐으면 편하게 사셨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웃음). 건설 노동자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집도 몇십 채 지었으니 전공 덕도 본 셈이다. 내 별명이 ‘나르는 질통’이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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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부기 공제회 내 여성대리 기사들의 모임인 '여자 만세' 회원들. 이미영 대리기사가 주도해 만든 '여자 만세'는 다큐멘터리 '밤의 유령'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카부기 공제회 제공 |
◇밤의 유령, 이미영 대리기사
-송경용 신부와 한국노동재단 공동 이사장을 맡으셨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추대됐더라(웃음). 2차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열심히 대변하겠다.”
-별명이 왜 ‘밤의 유령’인가?
“콜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어둠 속을 떠도는 직업이라서(웃음).”
-여성 대리기사의 일상을 담은 다큐 ‘밤의 유령’이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돼 화제가 됐다.
“10년 전만 해도 여성 대리기사는 성매매 하러 나온 여성으로 취급받았다. 미투 운동과 코로나 여파로 진상 고객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자라 희롱하고 무시하는 문화는 여전히 있다. 그래도 영화를 본 분들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을 하시네요’ 해주니 뿌듯하더라.”
-늘 이렇게 정복을 입고 운전하나?
“고객에 대한 예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대리기사를 막장 직업, 하층 직업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안전한 직업은 아닐 텐데.
“일반 직장, 식당, 학원을 거쳐 식품 납품업을 하다 실패한 뒤 40대 후반에 대리기사 일을 시작했다. 원체 겁이 없고 낙천적이다(웃음). 일반 회사와 달리 남녀 급여에 차별이 없어서 좋더라. 열심히 일한 만큼 벌 수 있으니 한 콜이라도 더 따려고 이를 악물었다. 여성 기사들 위해 ‘한밤의 해우소’라는 앱을 만들어 심야에 개방하는 전국 화장실을 지도로 만들기도 했다.”
-부산·울산·경남지역 대리기사의 자조 모임인 ‘카부기 공제회’ 회장이기도 하다.
“대리기사는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입원하면 경제적으로 타격이 크다. 벼랑 끝에 서도 도움 받을 곳 없으니 십시일반 모금해 도와주던 것이 그 출발이다. 매달 1만5000원씩 회비를 내서 입원비, 수술비를 지원한다. 3년 전 90명으로 시작했는데 현재 400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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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영 신부, 이미영 대리기사가 옛 구로공단 자리에 위치한 한국노동재단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더 많은 사람들이 2차 노동자들의 삶과 고통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소망했다. /박성원 기자 |
◇ 서로의 은행이자 보험
-민주노총에도 대리기사 노조가 있지 않나?
“노동조합은 임금 투쟁이나 교섭이 주 임무라 상조나 공제엔 제약이 있다. 당시 대리기사 노조 지부장이 생활고와 사채빚에 시달리다 아내와 자살한 사건에 충격받은 김철곤 카부기 공동대표가 노조 탈퇴 후 대리기사 공제 모임을 만든 이유다.”
-약값, 병원비를 지원하다 지금은 소액 대출도 해주는 규모로 커졌다.
“다들 어렵지만 나보다 더 힘든 동료들에게 내 작은 돈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 공제회 재정이 모자라는 것 같으면 하루씩 ‘재정 콜’을 타서 보탠다. 서로의 은행이자 보험, 안전망이 되어준다.”
-올해 ‘근로자의 날’에 산업포장을 받더라.
“카부기 공제회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공제회가 더 널리 확산되도록 지원하는 ‘노동약자법’이 하루 빨리 통과되었으면 좋겠다.”
-노동도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대리기사를 하기 전에는 나 또한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누구나 실직자가 되고, 누구나 2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거였다. 서로의 노동을 존중하고 고통을 나누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아들은 대리기사인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나?
“다큐 ‘밤의 유령’을 보고 엄청 짠했나 보더라. 산업포장 받는다고 하니 깜짝 놀라더라(웃음).”
-며느리 될 사람에게 내 직업은 대리기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나는 ‘기사님 덕분에 안전하게 잘 왔다’는 인사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할까?
“약자들의 따뜻한 길동무가 되어줄 사람.”(이미영 대리기사)
“청년들 결혼 상담을 할 때 딱 하나만 얘기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고. 강한 자에겐 굴종하고 약한 자에겐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네가 약해졌을 때도 그렇게 할 거라고. 대통령도 그렇지 않을까?”(송경용 신부)
☞송경용·이미영
송경용: 1960년 전북 전주 출생. 연세대 건축학과에 다니다 성공회 신학대로 편입,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86년 상계동에 ‘나눔의 집’ 설립을 시작으로, 건설·봉제·청소·조리 노동자들과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사회적 경제 운동을 펼쳤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주도했고, 생명안전시민넷·노동공제연합 풀빵 설립에 참여했다.
이미영: 1965년 제주서 태어나 경남 김해에서 자랐다. 대학 중퇴 후 식당, 교습 학원, 식품 납품업을 하다 2011년 대리운전 기사 일을 시작했다. 부울경 대리기사 자조 모임인 카부기 공제회 회장이다. 다큐 ‘밤의 유령’ 제작에 참여했다. 올해 산업포장을 받는다.
[김윤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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