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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고달팠지만, 행복하다”…왕관 내려놓는 ‘엘레지의 여왕’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 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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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고별 공연
66년 노래 인생 마무리한 ‘엘레지의 여왕’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가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 ‘전통 가요 헌정 공연-맥(脈)을 이음’에서 열창하고 있다. [쇼당이엔티 제공]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가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 ‘전통 가요 헌정 공연-맥(脈)을 이음’에서 열창하고 있다. [쇼당이엔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보면은 외로운 길 /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노래는 나의 인생 중)

66년을 걸어온 기나긴 길은 “어렵고, 외롭고, 고달픈 일이 많았다”고 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84)는 “나의 대(代)가 끝나면 전통가요가 사라질까 싶어 마음이 굉장히 외로웠다”고 했다. 지난 26~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 ‘전통 가요 헌정 공연-맥(脈)을 이음’에서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낸 이미자는 이전 모습 그대로 흐트러짐 없는 마지막을 맞았다.

이틀간 6000석 전석이 삽시간에 매진된 이미자의 이번 공연은 가수 이미자로서 서는 은퇴 무대인 동시에, 이미자의 왕관을 ‘전통가요’의 맥을 이어갈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자리였다. 그는 지난달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곡 녹음도 하지 않고 콘서트도 열지 않겠다고 말했다. 공연은 후배 가수 주현미, 조항조, 김용빈, 정서주가 함께 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전통 가요의 바통을 넘겨준다는 고별 공연의 취지를 언급하며 “초청에 응해줄까 했는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해 다행”이라며 웃었다.

그의 삶을 써내려간 듯한 ‘노래는 나의 인생’과 함께 붉은 장막이 걷히며 관객은 어느새 ‘엘레지의 여왕’과 함께 지난 시간 속으로 시계를 되돌렸다. 이미자와 한평생을 함께 해온 머리 희끗희끗한 올드팬들은 그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 [쇼당이엔티 제공]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 [쇼당이엔티 제공]



이미자의 노래는 엄혹하고 굴곡진 한국 현대사였다. ‘황성옛터’부터 ‘귀국선’, ‘해방된 역마차’, ‘가거라 삼팔선’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래 안에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한국전쟁 전후의 역사가 녹아들었다.

이미자는 “가요 생활을 오래 하며 고난도 많았지만 지금 너무 행복하다”며 “팬 여러분께 은혜를 입은 한 사람으로서 그 은혜에 어떻게 감읍(感泣)하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이외에는 더 보탤 게 없다”고 말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가슴을 칠 만큼 답답한 시간도 있었다. 그는 ‘동백 아가씨’가 금지곡으로 지정됐을 당시를 떠올리며 “35주 동안 방송 차트 1위 하던 곡이 하루아침에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 제 심정은 죽어야 할까 하는 마음이었다”며“그 곡이 22년 만에 해금됐고 그건 여러분의 사랑과 은혜 덕분”이라고 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전통가요의 ‘맥을 잇는’ 공연인 만큼 함께 한 후배 가수들은 이미자의 레퍼토리를 한 자 한 자 곱씹었다. 주현미는 ‘아씨’와 ‘여자의 일생’, 조항조는 ‘여로’와 ‘흑산도 아가씨’, 정서주는 ‘눈물이 진주라면’, ‘황포돛대’, 김용빈이 ‘아네모네’와 ‘빙점’을 불렀다. 노래는 시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었다. 이 노래들이 주제곡으로 실렸던 1960~70년대 영화와 TV 드라마 영상이 어우러질 땐 지나간 시간 속으로 모두가 여행을 떠났다.

이미자는 “전통 가요를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발라드나 가곡 등 다른 분야의 곡도 충분히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분야의 가수는 이 전통 가요를 못 부른다는 것은 제가 자부하면서 말씀드릴 수 있다”며 “그래서 이 노래들을 이어가야 하는데, 다행히 주현미, 조항조가 이어가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수 이미자 마지막 콘서트 ‘전통 가요 헌정 공연-맥(脈)을 이음’에서 관객들이 포토월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연합]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수 이미자 마지막 콘서트 ‘전통 가요 헌정 공연-맥(脈)을 이음’에서 관객들이 포토월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연합]



이날의 공연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의 음반 작업, 콘서트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은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이미자는 “이렇게 훌륭한 후배 가수들이 많은데, ‘옛날에 어떤 노래가 어떤 식으로 불렸다’는 것을 조언할 기회가 많이 있을 것 같다”며 “그런데 은퇴라고 이야기를 해 놓으면, 조언하러 TV 인터뷰에 나갈 때 ‘은퇴해 놓고 화면에 또 나온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느냐. 은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괴롭다”고 했다.


마지막 공연의 백미는 단연 ‘동백아가씨’였다. 동백꽃 꽃잎이 흐드러진 영상 아래도 수만 수천번 불러온 이 노래가 절절하게도 흘러나왔다. 감기로 인해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단단하고 애틋한 목소리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날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다. 부를 때마다 민망하다는 19살 소녀의 ‘보기만 하여도 울렁’한 순정 역시 정직하고 정확한 리듬과 음정에 앳된 마음을 실어 보냈다.

이미자는 공연을 마무리하며 “트로트를 하는 가수들은 참 외롭고 힘들다. (전통가요는) 들으면 신나는 게 별로 없고 따분한 느낌이 많이 들 수도 있다”며 “(동백 아가씨가) 33주간 1등을 했어도 나는 소외감을 갖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말 애절한 마음으로 노래하지 않으면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며 왕관의 무게를 내려놨다.

공연장에서 만난 백발의 팬 김순자(85) 씨는 “마지막 공연이라는 말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자 씨의 노래에 위로받았던 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오래도록 노래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