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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대학가 ‘돈줄’ 압박…발 빠른 나라들은 기회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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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캠퍼스에서 의과대학 의사와 간호사, 연구원, 교직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학 자율성 압박과 지원금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대학들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와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무려 13조원이 넘는 보조금을 끊겠다는 압박에도 하버드대는 제 갈 길을 그대로 가겠다고 맞선 반면, 컬럼비아대는 정부 압력에 굴복했다가 내부 분란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저지르고 있는 전쟁범죄를 규탄한 것이 ‘반유대주의’라 공격하고, 한술 더 떠 거기에 ‘인종주의’라는 낙인을 찍어 연구 자금을 끊는 정부. 젠더 평등, 성소수자 배려에 대해서는 ‘여성 역차별’이라 주장하며 역시나 대학을 압박한다. 진보 성향을 보여온 대학들 길들이기로 보인다.



트럼프 정부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교육을 중단하라며 돈줄을 쥐고 대학들을 압박하면서, 그런 가치들이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준 힘이었음을 통째로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악관의 압박을 받고 있는 미국 대학들은 정말로 진보적이었을까?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을 중시해왔다는 점에서라면 확실히 그렇다.



하버드대는 ‘평등, 다양성, 포용성, 소속감 사무실’(EDIB)이라는 전담 부서를 운영하면서 캠퍼스 내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증진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이니셔티브를 실행해왔다. 연구실문화혁신기금(HCLIF)을 만들어서 학생이나 교직원, 연구원들이 캠퍼스 내 포용성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실행하면 5천달러에서 1만5천달러까지 보조금을 주기도 했다. 장애인 학생과 교직원을 위한 프로그램도 많았다.



트럼프는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거다. 지난달 말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 보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지지하는 학생이 너무 많은 곳’이라고 판단되는 대학들은 외국인 유학생을 아예 못 받게 하는 방안을 트럼프 정부가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이나 교육기관이 학생(F-1) 비자나 직업교육(M-1) 비자를 발급해주는 ‘유학생·교환학생 인증 프로그램’(SEVP)이 있는데, 정부가 특정 대학들에는 이 프로그램을 승인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정부효율부는 예산을 아낀다면서 대학의 연구 자금을 삭감하고, 이념과 정치 성향까지 문제 삼는다. 이렇게 되면 외국의 인재들에게, 미국에서 배우고 연구할 유인이 당연히 줄어든다. 특히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스템) 분야에서 미국이 오랫동안 세계를 이끌 수 있었던 데에는 외국인 인재들의 공이 컸다. 그런데 이민 정책이 복잡해지고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지면서 외국 인재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많았고, 여기에 대한 연구 논문까지 나왔다.



사이언스 폴리시 리뷰에 2021년 실린 ‘국제 과학자, 엔지니어, 학생이 미국 연구 성과와 글로벌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 논문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데이터를 이용해 미국 대학의 연구 성과에 외국 출신 과학자들이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분석한다. 2018~2020학년도에 2천명 이상의 학자가 이 학교에 방문 연구자로 등록돼 있었고, 연간 유학생은 4천명에 육박했다. 2015~2019년 종신 교수나 정년 트랙 교수 1125명 중 43%인 502명이 외국 태생이었다. 그런데 논문의 절반 이상이 이들에게서 나와, 미국 태생 교수들보다 실적이 좋았다.



미국이 인재들에게 갈수록 문을 닫으니, 발 빠르게 움직이는 나라들엔 기회가 될 수 있다. 논문에서는 중국, 캐나다, 영국의 움직임을 미국과 비교했다. 2008년 시작된 중국의 ‘천인계획’(千人计划)은 세계의 과학자들을 중국 대학과 연구소들에 불러들이기 위해 정부가 지원해주는 제도였는데, 코로나19 이전까지 6만명 이상의 과학자를 불러 모았다. 촉망받는 과학도가 아니더라도, 외국 특히 개발도상국 학생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는 것은 미래를 위한 엄청난 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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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문대 칭화대의 모태가 된 칭화학당. 중국의 인재 유치 프로그램 천인계획으로 이 대학에도 외국의 우수 인재들이 초빙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은 중국이 아프리카를 자기네 텃밭으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하지만, 중국이 물건을 팔고 도로만 깔아준 것이 아니다. 2003년 중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아프리카 출신 학생 수는 2천명도 안 됐는데 2019년에는 8만1562명이었다. 2019년에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출원된 국제 특허 건수(5만8990건)가 미국(5만7840건)을 능가했다. ‘질보다 양’이라는 지적도 많지만 중국의 약진에 외국 출신 인재들이 큰 몫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자 그해 미국 상원은 중국의 천인계획을 ‘미국의 이익에 대한 위협’이라고 선언했다.



캐나다는 2015년 고도로 숙련된 이민자들을 받기 위한 고속입국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미국 영주권을 받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과학자, 엔지니어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캐나다 정부와 기업들은 실리콘밸리에 광고판을 세워놓고 홍보를 한다. 실제로 트럼프 1기 때인 2017~2019년 캐나다로 간 고숙련 이민자 75%가 미국에서 간 사람들이었다.



영국은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의사와 간호사의 비자 상한을 폐지했고, 엔지니어와 정보기술(IT) 전문가를 포함한 고숙련 직업군도 거기에 추가했다. 영국 의회는 2018년에 ‘과학과 혁신을 위해 일하는 이민 시스템’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고숙련 직업군 비자(Tier-1) 자격 요건을 완화하라고 권고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020년 1월 이 비자를 ‘글로벌 인재 비자’로 대체하고 연간 발급 건수 제한을 없앴다. 이 비자로 영국에 간 연구자와 가족들은 3~5년 지나면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



미국도 조 바이든 정부 때 뒤늦게 노력을 하기는 했다. 2021년 미국 시민권법, 스타트업법, 스템 인재 유지법 등을 만들고 고쳐 박사 학위 소지자를 비롯해 과학자, 엔지니어들의 비자 장벽을 낮춰준다고 했다. 하지만 제도가 너무 복잡하고 전체 비자 발급 건수도 크게 늘지 않았다.



천인계획 대 유학생 추방, 단순 비교로 국가의 미래를 점칠 수는 없지만 미국이 왜 저런 길로 가는지 세계가 의아해한다. 한국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 한국이 주요 ‘인재 유출국’ 중의 하나로 꼽혔다는 보도를 봤다. 외국 인재들을 불러들이기는커녕, 윤석열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줄이면서 등 떠밀려 중국행을 택한 한국 인재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돈과 물건뿐 아니라 사람과 두뇌도 움직이고 흘러 다니는데 우린 요 몇년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구정은 국제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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