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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128명의 ‘개성 뿜뿜’… 목포 포도책방의 공유 실험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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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128명의 ‘개성 뿜뿜’… 목포 포도책방의 공유 실험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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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저녁 목포 포도책방의 세번째 책 파티 참가자들이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잡거나 진열된 책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 12일 저녁 목포 포도책방의 세번째 책 파티 참가자들이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잡거나 진열된 책을 살펴보고 있다.


꽃망울이 터진 벚꽃이 무색하게, 기온이 크게 떨어지고 비바람이 거셌다. 전남 목포의 원도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있는 항구 근처 거리는 인적마저 드물었다.지난 12일 저녁,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뚫고 한 책방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포도책방이 마련한 세번째 책 파티였다. 목포수협 뒤 미곡 창고의 내부를 개조한 책방은 길가에선 보이지 않고 간판도 없다. 처음 오는 이들은 찾아오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이날 북토크 초청 저자는 미국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도시 탐구자인 로버트 파우저 박사. 그가 지난해 초 출간한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혜화1117 펴냄)가 이야기 주제였다. 파우저는 ‘외국어 학습담’, ‘도시 독법’, ‘서촌 홀릭’, ‘서울의 재발견’(공저) 등의 책을 한글로 썼을 만큼 우리말에도 능통하다. 100분 가까이 진행된 주제 강의와 질의응답은 재미있고 진지했다. 지방 도시 쇠퇴(‘지역 소멸’이라는 표현은 너무 비감하다) 속 개발 압력과 역사성 보존이라는 요구와 가치가 상충하는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의 현실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포도책방은 그런 현실에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는 단비 같은 곳이다.



지난 12일 저녁 목포 포도책방의 세번째 북토크 저자 로버트 파우저(맨 왼쪽)와 포도책방 기획자 조 반장(왼쪽 두 번째)이 참가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지난 12일 저녁 목포 포도책방의 세번째 북토크 저자 로버트 파우저(맨 왼쪽)와 포도책방 기획자 조 반장(왼쪽 두 번째)이 참가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포도책방은 지난 2월20일 정식 개점했다. 2층 적벽돌 건물인 이곳은 애초 미곡 창고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 쌀 수탈 전초기지였던 목포에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공급량을 조절하기 위해 세운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의 쌀 저장고였다. 한때 지역독립영화관 목포시네마라운지엠엠(MM)으로 이용됐다가 영화관이 옮겨간 뒤 다시 문을 닫았다.



한동안 빈 건물로 방치됐던 이곳을 도시기획자 조경민씨가 지난해에 임대받아, 2층 60여평 공간을 책방으로 꾸몄다. 조씨는 본명보다 ‘조 반장’이란 별명으로 더 잘 통한다. 포도책방은 조 반장이 산파 구실을 하고 운영 책임을 맡지만, 책방 주인은 128명이나 되는 공유서점이자 문화 커뮤니티다. 포도 알갱이들이 모여 한 송이 포도인 것처럼 다양한 책장들이 모여 책방을 이뤘다. 일제의 쌀 수탈 창고가 100년 뒤 멋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 ‘오래된 미래’라는 다소 식상한 문구가 이곳에서 생명력을 얻고 있었다.



포도책방 내부의 원형 책장. 뒤쪽 빈 공간은 원형 회의실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포도책방 내부의 원형 책장. 뒤쪽 빈 공간은 원형 회의실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나무 보와 서까래가 훤히 드러난 천장 아래로, 벽면 2개가 6단 책장으로 빼곡하다. 가운데는 커다란 원형 책장이 들어섰다. 스크린이 설치된 앞쪽 공간의 평대에도 다양한 책과 150여종의 아기자기한 굿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책방은 책장 주인장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현재 7천여권의 책들은 시와 소설부터 역사, 지리, 여행, 인문, 경제, 페미니즘, 비건, 영화, 음악까지 다양하다. 책장마다 붙은 문패를 보는 것만으로 재미있다. ‘달밭의 꿈꾸는 유목민’, 경험 수집자 늘의 ‘퀘렌시아 책방’, 독립혁명가 김 알렉산드리아의 꿈을 되새기는 ‘알렉산드리아 서점’, 재주 많은 엔(n)잡러 ‘콩의 비밀 서랍’, 한상희의 ‘4·3이 나에게 건넨 말’, 지구에서 돌아다니다 목포에 정착해 ‘0원으로 살고 싶은’ 호모루덴스 방도르의 ‘X에서 Y로’, 두 도시 생활자 ‘엄마별의 뒤죽박죽 책방’…, 끝도 없다.



이곳에선 새책뿐 아니라 헌책도 사고판다. 헌책이 낡은 책은 아니다. 출간된 지 시간이 좀 지났거나 누군가의 손을 거쳐왔다는 뜻이다. 책 컬렉터이자 책방 큐레이터인 점주의 애장 도서나 추천서가 그 책을 원하던 이와 만나 자연스럽게 책 나눔이 이뤄진다. 책장 또는 평대 임대료는 크기에 따라 월 1천원(책장 소형)부터 월 3만원(평대 대형)까지 저렴하다. 128명 주인은 목포 시민(68.5%)과 전남의 다른 곳 주민(10.3%)이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서울·경상도·충청도·강원도 등 다른 지역 사람들도 30명 가까이 된다. 연령대도 10대부터 70대까지 아우른다.



포도책방에는 책뿐 아니라 다양한 굿즈도 눈길을 붙든다.

포도책방에는 책뿐 아니라 다양한 굿즈도 눈길을 붙든다.


이날 책 파티에 온 조정옥씨는 경북 영천이 고향이다. 서울에서 사회적 경제 활동가로 일하는 그도 포도책방에 ‘샤론의 책장’을 갖고 있다.



“대학 다닐 때(96학번) 1980년 5월 광주항쟁이라든지 지역 차별 같은 것들을 처음 알게 되면서, 마음속에 전라도에 대한 부채가 생겼어요. 전라도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는 2년 전 목포의 도시재생사업 협동조합의 투어 프로그램으로 목포에 처음 왔다가 이 도시에 반했다. “그 뒤로 힘들거나 지칠 때면 자꾸 목포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나의 ‘반려 도시’랄까?” 그러던 참에 페이스북에서 포도책방 점주 모집 게시글을 봤다. “콘셉트가 너무 재밌고 대단한 거예요. 얼굴도 모르는 조 반장님한테 곧장 연락해 입점 신청을 하고 지난번 목포 여행 왔을 때 저만의 책장을 얻었어요.”



포도책방의 평대에 진열된 책들.

포도책방의 평대에 진열된 책들.


여행업을 하는 이한숙씨의 고향은 충북 보은이다. 서울로 대학을 간 이후 숨 가쁜 일상을 살다가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나서 우리 부부도 독립해야 해서” 후보지를 찾았다.



“여행이 저희 직업이니까 전국을 돌아다녔죠. 저는 목포가 너무 좋았는데, 남쪽 끝이라 좀 멀잖아요. 제 남편(앨런)은 미국 사람인데, 4시간 정도 운전하는 건 아주 가볍게 여겨요. 심리적 거리가 없는 거죠. 남편이 목포에 처음 왔을 때 구도심의 옛 거리를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거리를 걷더니 여기서 살고 싶다고 그래요.”



이씨는 포도책방에 ‘아티스트 웨이’라는 자기 책장을 마련했고, 앨런은 포도책방 옆에 있는 맥줏집 ‘1897건맥 펍’에서 포크 가수로 활동한다. 1897건맥 펍은 목포 만호동 건해산물상가 거리에 지역 주민들이 국내 최초로 펍과 숙박업을 하는 마을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한다. ‘치맥’(치킨+맥주)이 아니라 ‘건맥’(건어물 안주+맥주)이다. 이날 포도책방 책 파티 참석자들도 이곳에서 뒤풀이 수다로 즐거웠다. 숫자 1897은 조선말 부산(1876년), 원산(1880년), 인천(1883년)에 이어 네 번째로 목포가 개항한 1897년을 뜻한다.



설원(70)씨는 목포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서울로 대학을 간 뒤 줄곧 서울에서 살다 황혼 귀향을 했다. 지금은 유치원 원장인 그도 포도책방에 책장 몇 칸을 마련했다. 설원의 ‘자존감 충전소’.



“나이 들어 고향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목포에 이런 데가 생긴다더라’, 소문이 떠도는 거예요. 그 미곡 창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막 수소문을 해서 찾아왔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뜻이 너무 좋은 거예요. 매대를 많이 사겠다고 욕심을 부렸죠. 아이들 그림책은 표지가 보이게 펼쳐 놓아야 해서 공간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다른 신청자들한테도 양보해야 한다고 잘려서 책장 3개만 얻었어요.”(한바탕 웃음) 책장 이름에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때 굉장히 중요한 게 자존감이고, 어른도 어린아이도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믿음을 담았다.



목포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안군 수협 목포지점. 포도책방은 이 건물의 뒤쪽에 붙어있는 옛 미곡 창고를 개조했다.

목포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안군 수협 목포지점. 포도책방은 이 건물의 뒤쪽에 붙어있는 옛 미곡 창고를 개조했다.


포도책방 기획자이자 대표 조경민씨는 목포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서울 ㅎ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오랫동안 도시(문화)기획자로 활동했는데, 최근 몇년 동안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극심한 마음고생을 하다가 귀향을 결심했다.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공유서점의 꿈이 그렇게 싹텄다. 근대역사문화 거리에 비어 있던 미곡 창고가 책방 터로 맞춤했다. 건물 소유주인 건해산물상가 상인회를 찾아갔다. “책방이 돈이 되겄소?”(상인회장)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조 반장) 포도책방 구상의 취지와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상인회장은 크게 반겼다. “‘그라믄 (임대료) 이만큼만 주쇼’ 그래요. 그런데 그게 서울에선 한 다섯평 단칸방 월세밖에 안 될 만큼 저렴하죠.” 조 반장의 말이다.



“제가 도시를 다루는 사람이다 보니 전국 각지를 다녔어요. 그런데 지방으로 갈수록 도시가 점점 쇠퇴하고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지난 60~70년 동안 지방이 서울로 인력을 공급하는 시스템이었죠. 그렇게 서울이 국제적인 도시가 되고, 서울의 경쟁력이 한국의 경쟁력이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방이 무너지고 있고, 덩달아 서울의 경쟁력도 약화되고 있어요. 로컬의 자생력, 역동성을 되살리는 데 함께할 사람들을 찾고 싶었어요.”



로버트 파우저 박사가 1980년대에 목포에서 찍은 옛 도시 풍경 사진들이 벽면에 전시돼 있다.

로버트 파우저 박사가 1980년대에 목포에서 찍은 옛 도시 풍경 사진들이 벽면에 전시돼 있다.


그런데 왜 공유서점이었을까? 조 반장이 꼽은 열쇳말은 ‘다양성’이었다.



“지방이 무너지는 것은 다양성이 무너지는 거예요. 다양성을 살려야 하는데, 책만큼 다양성이 풍부한 게 없어요. 세상의 모든 직업이나 주제는 그것에 관련된 책이 다 있어요. 지역 공동체형 책방을 만들고 사람들을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죠.”



소셜미디어에 책방 계획을 알리고 참여자를 모집했다. “갑자기 난리가 났어요. 개점도 하기 전에 모든 매대가 완판되고 입점 대기까지 생긴 거죠. 깜짝 놀랐어요. 지방 도시에서 이 정도의 폭발적 반응은 정말 오래간만에 본 거죠.”



대기자 명단에는 서양화가 윤선미씨도 있다. 목포에서 ‘퐁당퐁당’이라는 독립서점을 운영한다.



“128명의 사람이 각자 자기만의 개성에 맞춰서 책방을 구성하는 게 재밌어서, 저도 따로 책방이 있지만 여러 사람과 같이 참여하고 싶어졌어요.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다 들여다보고 오티티(OTT)로 영화·드라마를 즐기는 시대지만, 디지털 기기에 대한 피로감도 쌓이는 것 같아요.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니까. 종이책은 자연과 가까운 느낌이어서 디지털 피로감도 덜고 휴식과 사색을 할 수 있잖아요.”



포도책방 내부 모습.

포도책방 내부 모습.


지난달에는 독립서점, 독립영화관, 독립작가 등 목포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독립공감’의 월례 모임을 포도책방에서 했다. “북 콘서트, 심야 책방, 독서 모임, 필사 모임도 하고, 지역 주민들과 문화 활동 같은 거 하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하게 오셔요. 그렇게 다양한 사람의 생각이나 목소리를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아요. 책을 같이 읽고 독서 모임을 하면, 책 한 권을 읽었는데 (참가자 수만큼) 열 권을 읽은 느낌이죠.”



포도책방이 책 전시·판매와 북토크만 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에는 ‘지랄 같은 향수, 목포’라는 주제로 첫 향토 사진전을 열었고, 2월에는 청년 커뮤니티 유난무브먼트의 ‘나라걱정부’가 이곳에서 지역 순회 국무회의를 열었다. 포도책방은 연중무휴,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 문을 연다. 페이스북(www.facebook.com/jobanjang)에서 자세한 내용과 최신 소식을 알 수 있다.



글·사진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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