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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한 듯 냉정한 일본의 트럼프 전략 [4강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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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국제 상황에서 민감도가 높아진 한반도 주변 4개국의 외교, 안보 전략과 우리의 현명한 대응을 점검합니다.

가장 먼저 협상에 나선 일본
'마지막까지 친구'라는 신호
성공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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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관세 협상을 하기 위해 미국 백악관을 찾은 일본 측 협상 대표 아카자와 료세이(오른쪽) 경제재생상이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 대통령이 사인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쓰고 웃고 있다. 백악관 제공


4월 16일, 미국이 지목한 우선협상국 5개국 중 일본이 가장 먼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협상 대표로 나선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회담 직후 기자들에게 "(자신은) 하급자 중의 하급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상대국 국가원수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이라 설명했지만, 국익을 대표하는 장관으로서 지나친 저자세라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다. 협상 초반부터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선을 빼앗긴 것 아니냐는 우려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 발언을 단순한 굴종으로만 볼 수 있을까?

아카자와 대신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최측근으로, 20년 이상을 함께한 정치적 동반자다. 지난 2월 7일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시바 총리와 함께 협상전략을 고민한 인물이다. 아카자와는 트럼프 1기 시절, 당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가장 먼저 면담에 나서며 미국과 밀월관계를 구축했던 '퍼스트 프렌드(First Friend)' 전략이 일정한 실익을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번에도 미국의 통상 압박에 가장 먼저 응답함으로써 '일본은 끝까지 미국을 지지하는 동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그 대가로 실리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시바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대미 투자 1조 달러 확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증대, 방위비 두 배 증액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4월 2일을 '미국 해방의 날(Liberation Day)'로 선포하며 철강, 알루미늄, 자동차에 대한 품목별 관세 외에도 일본에 대해 상호관세 24%를 추가 부과했다. 일본 언론은 "선물 보따리 들고 간 일본이 뒤통수를 맞았다"며 이시바 총리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가장 먼저 협상을 요청했고, 결국 16일 미국과 가장 먼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미국이 바라는 '모범 답안'을 제출한 셈이다.

‘라스트 프렌드’ 전략은 비굴해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냉정하고 계산된 선택일 수 있다. 트럼프식 협상전략은 특히 동맹국들 사이에 ‘죄수의 딜레마’를 유발한다. 상호관세가 유예된 90일 동안 모두가 협상을 미루면 미국이 불리하지만, 한 국가라도 먼저 타결하면 나머지 국가들이 초조해진다. 일본이 가장 먼저 협상에 나선 것도 동맹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 대신 실리를 취하려는 전략이다.

물론 이 전략에는 함정도 있다. 주요 통화국 전체를 아우르는 환율 협정의 기반을 마련하는 게 미국의 속셈이라면 일본은 까다로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른바 '마라라고 합의(Mar-a-Lago Accord)'가 그것이다. 미국은 이 합의의 첫 단추로 일본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채 최대 보유국이자,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도가 높은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방위비 증액, 고율 관세, 에너지 수입 확대 등을 지렛대로 삼아 일본을 환율 협정 테이블로 끌어들일 공산이 크다.

한국과의 2+2 고위급 통상 협의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됐다. 환율은 재무당국 채널을 통해 논의하기로 했지만, 미국은 "다음 주 중 상호이해에 기반한 원칙적 합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우리도 일본과 유사한 경로에 놓인 셈이다. 이러한 접근이 실질적 이익으로 이어질지, 미국의 더 큰 구상에 휘말리게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중차대한 시점에 전략을 이끌 최고 책임자 부재가 그 어느 때보다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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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