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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소외된 곳’ 향했던 교황…그 걸음 따라 조금씩, 절망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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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기고 I 김중미 작가



지난주 성주간을 지냈다. 성목요일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예수처럼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발을 서로 씻어주고, 예수가 죽은 성금요일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어리석은 군중이 되어 뉘우치고, 토요일에는 예수를 따르던 여성들과 함께 그의 부재를 슬퍼했다. 부활 성야에는 공동체 식구들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지역의 작은 공소 식구들이 만나 미사를 드렸다. 우리가 켠 부활초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던 것은 우리가 지나온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 때문이었다. 춥고 밤이 깊을수록 봄을, 빛을 더 절실히 기다리는 법이다. 다음날 아침, 교종 프란치스코 서거 소식을 들었다. 예수를 따르던 여성들이 발견했던 빈 무덤이 떠올랐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선택한 최초의 교황이라는 것이 화제가 될 만큼 교회는 가난과 환대에서 멀어져왔다. 미사 강론에서 사제가 가난, 나눔, 연대를 이야기하면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2년 전 한 교구에서 사회교리를 담은 원고 요청이 왔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글까지 4회분의 원고를 보냈다. 그러자 교구에서 글을 수정해 달라고 했다. 이미 교황이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고, 트랜스젠더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한 뒤였다. 수정을 거부하고 모든 원고를 되돌려받았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교황은 나를 비롯해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희망이었다.



1983년 강남성심병원 수납실에서 근무하면서 원풍모방 민주노조 투쟁을 목격했다. 구사대에게 맞아 응급실에 실려 오는 여성 노동자들이 병원 로비까지 찼지만, 경찰은 그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다루는 신문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그 여성들의 곁을 지키는 외국인이 있었다. 그가 한 가톨릭 수도회의 사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권력과 부가 아닌 나와 같은 약자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1984년 영세를 받고 맞은 첫 성탄절, 가톨릭 신자의 의무인 판공성사를 앞두고 며칠 동안 고뇌했다. 병원에서 마주치는 어린 산재 노동자들, 돈이 없어 고통받는 환자들 앞에서 무기력한 나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해성사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주임 신부가 미사에 몇번 빠졌는지만 말하고 나가라고 했다. 도망치듯 고해성사실을 나왔는데, 성당 마당은 예수가 탄생하던 말구유 장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그곳에는 예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있을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이 인천 만석동이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한 선택이었다.



즉위 전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촌에서 사목했다. 그는 교황이 된 뒤 바티칸 내 교황 전용 숙소가 아닌 교황청 사제들의 기숙사인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지냈으며, 교황의 상징인 금 십자가 대신 낡은 십자가를 걸고, 교황의 상징인 빨간 구두 대신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기 전, 이방인, 어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세리, 한센병 환자들과 장애인, 과부와 함께했다. 교황은 예수가 사랑한 사람들 곁을 지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계신 곳은 바티칸이 아니라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거리의 교회’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예수가 제자들과 한 성찬례를 기념하며, 스스로 파스카 제물이 된 예수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몸과 피가 되겠다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전교는 말하되, 거리로 나가 그 성찬례를 ‘실천’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더 특별했다.



12년 동안 교황 월급을 받지 않은 그는, 단돈 14만원의 재산만을 남기고, 어떤 장식도 없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만 새긴 관에 누워 바티칸 성벽 밖,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죽었으나 신에게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루카 복음 3장 22절)이고, 우리에게는 마음에 켠 부활초로 살아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이들이 그의 부재로 절망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교황이 취임 첫 미사에서 했던 “우리가 걸음을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멈추어 서게 된다”는 말을 기억하며, 그를 따라 조금씩 걸음을 옮겨보려 한다. 절망하지 않게, 멈추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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