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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이상훈 상임위원이 인터뷰에 앞서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6층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내일은 더 좋아질 거예요. 그래서 남은 사람들에게 덜 미안합니다.”
23일로 2년의 임기를 마치는 이상훈(5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선영 위원장 체제에서 불안을 느끼는 이들은 이 상임위원이 2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종료되는 11월까지 남아 위원장을 견제하고 중심을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는 정권교체가 되는 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진실화해위에 조금씩 새로운 빛이 비칠 것이라 봤다. 일찌감치 본인을 추천한 더불어민주당과 박선영 위원장에게 연임 의사가 없음을 밝힌 이유다. 이제 본래 활동하던 경제개혁 분야로 돌아간다.
이상훈 상임위원은 ‘회사법’을 전공한 경제 전문 변호사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금융노조 산하 금융경제연구소장, 경제개혁연대와 참여연대의 실행위원 등이 이력에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소송 감시활동, 동국제강 사주를 상대로 한 대표소송(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이사의 책임을 묻는 소송)과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연임반대 주주운동의 앞줄에 서기도 있다. 그래서 과거 국가폭력 범죄를 규명하는 진실화해위는 생소했던 게 사실이다. 22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6층 상임위원실에서 이 상임위원을 만나 진실화해위 위원으로 느낀 2년의 소회를 들었다.
진실화해위에서 이 상임위원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을 제외한 인권침해사건을 총괄하는 2소위원회 위원장이었다. 2기 진실화해위에서 2소위에는 영화숙·재생원 등 각종 시설 사건과 삼청교육대, 해외입양, 군 의문사 사건 등 3792건이 배정됐다. 소위를 거친 사건 3158건이 위원장 포함 9명의 위원이 있는 전체위원회에 부쳐져 이중 2444건이 진실규명됐다.(15일 기준) 하지만 5월26일로 만료되는 조사 기간이 촉박해 ‘조사중지’ 결정으로 차기 진실화해위로 넘겨지는 사건도 450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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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열린 진실화해위 제106차 전체위원회에서 이상훈 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이상훈 상임위원은 임기 초부터 부당한 일에 직면하면 거침없이 싸웠다. 2023년 6월 국정원 출신 황인수 조사1국장의 채용설이 나올 때 한겨레에 제보했고, 제보자 색출작업이 진행되자 실명을 밝히며 인터뷰했다. 이 일로 이 상임위원은 황 국장에게 고소당한 상태다. 황 국장은 우려했던 대로 전임 김광동 위원장-이옥남 상임위원과 함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부역자 심사’의 한 축으로 여겨진다. 이 상임위원은 전체위 때마다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고, 자신의 관할이 아님에도 진실규명이 보류된 영천 사건 희생자 유족 등을 방문해 한국전쟁기 사건을 조사하는 1국 조사관들에게 힘이 됐다. “한국전쟁기 사건의 특징은 자료가 없고, 진술에 의존해야 한다는 거거든요. 현장 조사한 조사관 의견을 최대 존중하고 뭔가 이상하면 충분한 토론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이 상임위원은 진실화해위원으로서 투쟁보다는 타협에 더 힘을 쏟았다고 했다. 비율을 묻자 8대2였단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때는 민감한 안건을 둘러싸고 서류를 집어 던지며 소리 지르고 싸웠는데, 여기서는 제 주장이 밀리더라도 피해자 구제가 되는 쪽으로 타협했어요. 여당 추천 진실화해위원 중에서도 장영수·김웅기 위원이 저희 쪽 의견에 간혹 동의해주셨고요.” 특히 1980년 비상계엄 당시 한신대 모집중지 사건이나 군 의문사 사건을 들어 “장영수 위원 도움이 없었다면 인권침해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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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열린 제108차 전체위원회가 시작하기 전 이날로 임기를 끝내는 위원들과 위원장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만 보면 평화로워 보인다. 왼쪽부터 이상희·이상훈 위원, 박선영 위원장, 차기환·이옥남 위원. 오동석 위원은 이날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진실화해위 제공 |
이 상임위원은 2년 동안 두 위원장을 겪었다. 군경에 의한 학살을 정당화하는 부적절한 발언으로 내내 논란을 빚은 전임 김광동 위원장과 1년8개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직후 임명해 논란이 된 박선영 위원장과는 4개월여 함께 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어떻게 볼까. 북한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갖고 있고, 그런 증오감을 갖고 있어야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공통점인 것 같다고 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각각 ‘무서운’과 ‘이상한’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했다.
김광동 전 위원장에 대해선 “뉴라이트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확산해 우리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어떤 진심이 느껴져 무섭다”고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생각이 달라도 사적인 대화는 순조로워 전체위나 상임위가 끝난 뒤 늘 밥을 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박선영 위원장과는? 딱 두 번 가고 그 뒤로는 밥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내가 에이(A)라고 하면 위원장은 자기 맘대로 비(B)라고 정의해요.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꿰맞춥니다. 지난달 5일 기자회견 때 ‘자신과 야당 추천 위원의 사이가 좋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기함을 했어요.”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 대화는 더 안 통한다. 그래도 되도록 참고 진실규명 결정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했다. 이 상임위원은 “박 위원장이 자꾸 피해자를 위한다고 말하는데, 피해자를 진짜 위하면 스스로 물러나는 게 가장 좋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2기 진실화해위 기간 연장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박선영 위원장 체제를 더불어민주당이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이 물러난 상황에서 기간연장이 이뤄질 경우 단절을 피할 수 있어 피해자와 조사관 모두에게 좋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조사관 한 명이 상임위원실에 들어왔다. 조사1국의 조사관이라 했다. 직속 상관은 이옥남 상임위원이지만, 정작 이상훈 상임위원에게 더 크게 의지해온 듯 했다. 그가 동료들과 만들었다며 수줍게 건넨 롤링 페이퍼에는 이런 3행시가 적혀있었다. ‘이: 이상적인 인권의식, 상: 상당한 강경함으로, 훈: 훈훈하게, 조사관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삼행시에 대한 답이 될만한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다. 잠깐 생각에 잠긴 이 위원이 말했다. “그냥 잘 버텨줘서 감사하고 대견할 뿐입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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