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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신군부에 맞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연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비상계엄이 선포된 1980년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다가 강압 수사를 받고 숨진 고 임기윤 목사의 유족들은 “피해자 가족에게는 별도의 위자료 청구권이 없다”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 판단을 받기로 했다. 1심과 2심 법원은 “국가가 임 목사에게 위자료 2억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면서도 유족들이 겪은 트라우마에 대해선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법원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가족의 고통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지’를 두고 엇갈린 판단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최근 수년간 과거사 문제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단을 내렸는데도 과거사 배상 문제에 대한 일관된 법리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법원 “임 목사 유족들 권리 소멸됐다”…5달 전엔 정반대 판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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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에서 강압 수사를 받다가 숨진 고 임기윤 목사의 유족들과 임 목사 국가배상 추진위원회가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항소심 판결 규탄 및 상고 제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
임 목사의 유족들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와 ‘순교자 임기윤 목사 국가배상 추진위원회’는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9일 나온 2심 판결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국가폭력 피해자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건 법원의 직무유기”라며 “대법원이 전향적인 판결을 내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 목사는 1980년 강연회 등을 통해 5·18 광주 학살을 부산에 처음 알렸다. 같은 해 7월19일 계엄합동수사단에서 처음 조사를 받았고 조사 사흘째 돌연 쓰러져 같은 달 26일 숨졌다. 유족들은 임 목사의 시신에 고문 등 흔적이 있었다며 사인 규명 활동 등을 벌이다가 2023년 5월 국가를 상대로 60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과거사 문제 배상 사건에서는 피해자와 유족이 ‘구체적으로 손해를 인지한 날’을 언제로 봐야 하는 지가 중요한 쟁점이다.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유족은 헌법재판소가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는 가능하다”고 결정한 날(2021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권 발동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 정치적 책임만을 질뿐”이며 배상 책임은 없다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판례를 7년 만에 깨고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날(2022년 8월)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국가폭력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는 판례가 없어 권리가 제한돼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심과 2심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유족이 1998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돼 보상금을 받았을 때 손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고 봤다. 이로부터 3년이 넘게 흐른 2023년에는 이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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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배상 사건에 대한 최근 판례를 보면, ‘가족의 피해도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지’를 두고 법원은 엇갈린 판단을 내놓고 있다. |
반면 비슷한 취지의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사례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905부(재판장 김주옥)는 1980년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광주 시민들을 무력 진압한 계엄사령부 본부장의 범행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약 300일간 구금·폭행당한 A씨와 그의 부모·형제들이 겪은 정신적 피해를 국가가 배상해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재판부는 A씨와 가족들이 보상금을 받은 1990년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정부 측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2021년 헌재의 위헌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원고들(A씨와 그의 가족)이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법률상 장애 사유가 존재했다”며 “그전까지는 소멸시효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 목사 사건과 쟁점이 같지만 재판부 판단은 정반대로 갈린 셈이다.
과거사 배상 막은 ‘양승태 판결’ 뒤집혔는데, 아직도 법원 논리는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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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24일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24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민중당 관계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과거사 배상을 가로막았다고 비판받았던 ‘양승태 판결’을 대법원이 다시 뒤집은 2022년 8월을 기준으로 청구권 소멸시효를 계산한 판결도 많다.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재판장 정현석)는 1977년 대학에서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해제와 유신헌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45일간 구금·폭행당한 B씨와 가족들이 낸 소송에서 “계엄포고로 인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는지 여부는 (2022년) 대법원판결 이전까진 불분명했다”며 “원고들이 권리행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임 목사 유족 측은 “과거의 잘못된 판례가 대법원에서 바로잡힌 후에도 법원이 일관성 없는 판단을 하고 있다”며 “대법원이 내린 결정을 법원이 스스로 부정한다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 [단독] ‘광주 밖 5·18 희생자’ 임기윤 목사 유족, 2심서도 ‘손배 청구권’ 인정 안 됐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4161417001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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