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사태로 정치만 흔들린 게 아니라, 경제 환경 전반이 흔들렸다. 소비가 부진한 것도 문제지만 국가의 연구개발(R&D)투자가 정체되는 가운데 미래 먹거리가 사라지고, 급감한 잠재성장률의 문제가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미국 트럼프 2기가 쏟아내는 ‘관세 폭탄’과 ‘리쇼어링’의 물결도 한국이 산업생태계를 재점검하지 않았다간 큰일을 겪을 것이라는 분명한 신호를 준다. 이제 모든 대선주자가 ‘혁신 성장’을 말한다. 모두 국가의 투자를 강조한다. 5년간 100조원에서 시작해 200조원까지 투자하겠다고 한다. 혁신정책 연구자로서 제조업과 혁신생태계를 전환할 ‘기회의 창’처럼 느껴진다.
산업 정책 논할 기회의 창
그래서 최근 케이(K)-엔비디아 논쟁이 가볍지 않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언급했던 내용 때문이다. 엔비디아 같은 유니콘 기업을 만들고, 거기에 공공이 투자해서 30% 수준의 지분을 확보하자는 것. 수익이 났을 경우 국민에게 배당하면, 재정 부담도 줄고 일종의 ‘기본소득’ 재원으로 쓸 수 있다. 국민의힘이나 개혁신당 등 다른 정당들은 이러한 기획이 기업을 통제하려는 사회주의적 수단이라며 비판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사회주의자들만의 공상만은 아니다. 영미권 산업정책 분야에서 저명한 마리아나 마추카토 런던대 교수는 2013년 발간한 ‘기업가형 국가’(The Entrepreneurial State)를 통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산업을 민간의 벤처 캐피탈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투자자 혹은 육성자로서 첫걸음부터 사업화까지 투자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친환경 기업 육성이나, 유럽 연합의 다양한 산업 정책이 마추카토의 영향을 받았다. 공공이 투자하면 과실을 공공이 누려야 한다는 생각도 이러한 논리에 새겨져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부실에 빠진 투자은행을 살려내려 국가가 지원한 과정은 이익은 사유화하고 위험은 공공이 부담하는 방식의 전형이었는데, 마추카토는 공공이 신산업의 초창기 위험에 대한 안전판을 제공하는 대신 이익도 공공이 전유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자고 한다.
주류 경제학에 기반을 둔 산업정책 이론은 국가의 역할이 제한적이다. 기업이 투자하기를 꺼리는 기초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가 대학에 투자하고, 원천기술을 만드는 응용연구 단계는 정부가 출연한 연구소(국립보건연구원 등)가 수행한다. 그리고 개발단계에서 사업화가 가능한 것을 갖고 스타트업·벤처기업이 들고나와 벤처 캐피털이 투자를 통해 육성시키는 방식을 규범으로 생각해왔다. 물론 국방 연구와 아폴로 프로젝트 등 국가의 적극적인 육성으로 수많은 기업이 탄생했지만, 사례로 자주 언급되진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산업정책에 대해서 특별한 거부감이 없다. 1973년 시작한 중화학공업화의 유산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6대 산업을 지정하고(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기계, 방산, 전자) 제조업에 도전해 보겠다는 업체를 선정하고 입지를 정했다. 전국의 시도가 경합했고, 포항·울산·창원·거제를 지나 여수까지 가로지르는 남동임해공업지구가 입지로 선정됐다.
정치가 바꾼 지역 공업화
이미 투자된 포항제철과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등의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해서, 또 일본에서 빠른 기술전수를 위해서, 전시에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생산기지를 보호하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지만, 정치적 맥락 역시 중요했다. 우리 지역으로 돈을 끌어오기 위해 선거철마다 중화학공업 투자계획이 이슈가 된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역 출신 실세를 찾아 사업 유치를 위해 애썼던 토호들의 기록 또한 수없이 존재한다. 남동임해공업지구가 여수까지 확장하게 된 계기도 ‘호남 푸대접 시정 위원회’를 만들고 저항하던 김대중 의원을 빼고 말하기 어렵다.
중화학공업화는 관료, 정치인, 기업가, 노동자가 만들어 낸 앙상블의 기적이다. 추진단장을 맡았던 오원철 제2경제수석은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를 통해서 경제적·공학적 효율성 관점에서 정부가 지도할 수 있는 산업발전의 매뉴얼을 작성했다. 기업가 정주영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으로 선박 브로커의 추천을 받아 투자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받고 조선소를 지으며 선박을 건조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뒤엔 이를 보증하기 위한 재무부의 물밑 작업이 있었다. 공고 출신과 직업훈련소(현 기술교육원)에서 조립과 용접, 가공 기술을 익힌 생산직 노동자들이 동남권을 가득 채운 것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인력수급계획과 운영이 뒷받침했다. 중화학공업화가 전두환 정권이 1980년대 구조조정을 통해서 과당경쟁을 축소하고 ‘기술드라이브’를 통해 기업의 연구개발(R&D)를 촉진해서라는 평가도, 개별 정책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수십 년 동안 국가가 산업의 발전 및 혁신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규모 산업정책은 산업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경관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중화학공업화는 동남권에 집중됐고, 1970년대 이후 30년에 걸쳐 이촌향도란 흐름을 만들었다. 한편에선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기업의 사무직 노동자나 전문직이 되려는 흐름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동남권으로 가 제조업 노동자가 되는 흐름으로 갈렸다. 동남권 산업도시는 1970~90년대 20대 생산직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정착하자, 시차를 두고 결혼이주로 여성들이 유입됐고, 높은 합계출산율로 도시가 팽창했다. 중화학공업화만큼 비수도권 지방에서 중산층을 대규모로 형성하고 지역을 융성하게 만든 프로젝트는 현대사에 아직 없다.
전략 산업의 지역 불균등도 말하라
이재명의 케이(K)-엔비디아도 좋고, 한동훈의 ‘한국형 팔란티어’ 육성도 좋다. 산업정책을 띄우는 선진국의 추세와 동기화하고, 지정학이 다시 대두하며 관세전쟁과 산업재편이 펼쳐지는 지금, 적절한 방향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내재역량을 확보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산업정책이 공간적 불균형을 고려하지 않을 때 어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판단해야 한다. 2023년 산업통상자원부는 2042년까지 민간투자 614조원을 확보하기로 하고,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 분야의 국내 소부장 생태계 조성과 경쟁력 확보에 기여할 것이라 밝혔다. 전국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투자가 진행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614조원 가운데 562조원의 반도체 분야 투자가 용인·평택에 집중돼 있다. 대기업이 입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국가가 판을 짤 때 새로운 집중(혹은 클러스터)의 축을 고려하지 않으면, 고착된 불균등이 확대되고 만다.
신산업을 전 주기로 국가가 지원해 육성하려면 특정한 입지를 국가의 공간 계획에 맞춰서 고려해야 한다. 그냥 두면 ‘우수한 인재’(명문대)와 ‘구상(연구 및 엔지니어링) 기능의 집결’이 완비된 수도권으로 집결할 것이다. 반대로 지역균형발전을 꾀한다면 연구개발과 양산을 모두 포괄하는 생태계(대학, 출연연, 벤처 기업, 지원기관)를 한 번에 지어야만 신산업 클러스터가 지역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제안을 해보자면, 3대 축의 산업생태계를 짜는 게 합당하다. 수도권은 경박단소 반도체와 이차전지를 지원한다. 충청권은 전국을 포괄하는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의 중심을 카이스트(KAIST)와 출연연구소들이 담당한다. 동남권은 중공업을 담당하는 지역의 제조 역량을 고도화하면서 팔란티어 같은 제조·방산 인공지능(AI) 플랫폼을 육성하는 역할을 가졌으면 한다. 양당 공약대로 산업은행 및 수출입은행의 부산 이전으로 정책 금융의 핵심지구로 기능 설정을 명확히 할 필요도 있다. 울산과기원을 확대해 동남권 과기원을 만들고, 출연연과 협업해 소부장 분야 ‘제조 유니콘’을 만드는 방식으로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면 된다.
자, 이제 판이 열렸고, 본격적인 산업 정책들이 쏟아질 것이다. 대선주자들이 밝히는 전략산업, 투자의 규모, 인재 양성의 청사진 등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살폈듯 제조업 육성 공약이 한국 사회의 지역적 불균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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