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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자기애나 취약한 자기애의 늪에 빠져 있다면[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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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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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냉정하게 말하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으나 절대적으로 나만을 생각해주길 기대하면 결국 실망하고 좌절하고 고통받을 겁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함을 받아들여야 마음의 평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자기애(自己愛)’라고 하고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하게 다룹니다. 자기애는 우리 삶에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이나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건강한 삶을 사는 데 방해꾼이 됩니다. 너무 심하면 자기애적 성격장애 진단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기애를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자기애를 보는 관점은 정신분석가들 사이에서도 다릅니다.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자기애보다는 무의식적 욕망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후배 분석가 하인츠 코헛은 자기애를 자신이 창시한 자기심리학의 중심 개념으로 정립했습니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건강한 자기애는 자아를 실현하려는 동기와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인식합니다. 건강한 자기애를 지닌 사람은 자신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려고 무리하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 묵묵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애 관리에 문제가 있는, 병적 자기애를 지닌 사람은 과도하게 자기애에 몰입합니다. 혼자 힘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을 써먹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과대망상에 가까운, 거창한 자기애의 덫에 스스로 빠집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자아상이 허세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식적인 자아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욕심을 지나치게 부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감탄하면서 우러러보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을 거느리는 자리를 얻으려고 사람들을 분열시켜서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자기애 기능이 취약한 사람은 우월감 추구와 열등감 인식 사이를 오락가락합니다. 거창한 환상은 품고 있지만 자신감 부족에 계속 시달립니다.

젖먹이로 세상에 태어나면서 엄마와 오래 붙어 있다가 서서히 떨어져서 독립적인 개체성을 획득하는 분리-개별화 과정이 반드시 순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엄마의 영향이 아주 큽니다. 관계를 이어가면서 자신이 엄마에게 공감받고 이해받고, 엄마와 소통하고 있다는 경험이 꾸준히 확보되지 않으면 자기애의 형성과 기능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건강하게 형성된 자기애를 지닌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이 세상과 만나는 사람들을 폭넓게 아낍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 밖의 세계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무리하지 않습니다.


병적인 자기애에 시달리는 사람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를 자신만만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초라하고 불쌍하고 한심하고 측은하고 가여운, 하찮은 존재로 끝장날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여 삽니다.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을 겁냅니다. 그러니 스스로 부풀린 자아상을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사랑보다는 숭배에 가깝습니다.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끼면 안정을 되찾지만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공감과 소통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와 남의 관계에서 남을 발판으로 삼아 딛고 올라서려고 하면 과대망상적 자기애이고, 나를 차라리 희생시켜서 정리하려 하면 취약한 자기애입니다. 자기애를 건강하게 배양하고 유지해야 마음을 건강하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나와 남의 좋은 점을 다 인정하고 남이 힘들어도 배척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면서 화합에 이르는 것입니다. 거창한 자기애 또는 취약한 자기애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면, 내 삶의 ‘대역’을 정리하고 내가 진정한 ‘주역’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기애는 바람을 알맞게 넣어야 제대로 기능하는 풍선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부풀리면 터지고, 바람이 빠져서 쭈그러들면 이미 풍선이 아닙니다. 꾸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숭배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웬만큼 괜찮은, 밉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선택의 문제입니다. 내가 기죽기를 남이 바라거나 내 기세를 꺾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저항해야 합니다. 단, 분노를 폭발시켜서 힘을 스스로 빼기보다는 힘 조절과 배분을 현명하게 하면서 대처해야 합니다. 잘 살아가려면 자기애 관리가 필요합니다. 살림을 살려면 벌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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