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하게 미국으로 달려간 해외 기업들은 가난해진 미국을 만날 확률이 높다. 미국의 역성장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이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 이제 25%에 불과하다. 패권 다툼 중인 미중美中이 세계 무역에서 빠져도 나머지 75%는 건재하다. 이번 관세 전쟁도 어떤 국가에는 세를 넓힐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 지점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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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거리에 노숙자들 천막이 들어서 있다. 골든 게이트 거리는 샌프란시스코 시청 등이 위치한 중심가다. [사진 | 뉴시스] |
우리는 '반기 든 마크롱과 백기 든 한덕수의 차이: 기업 애국심(4월 21일자)' 기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투자에 나선 기업들을 대하는 각국의 차이를 알아봤다.
■ 미국의 현실=그런데, 트럼프의 약속을 믿고 미국으로 달려간 세계 주요 기업들이 마주할 미국은 지금보다 더 가난한 미국일 확률이 매우 높다. 오랜 기간 미국의 번창을 봐온 우리에게 미국과 가난이란 말은 공존하기 힘든 조합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내에서는 오히려 미국의 번영이 한계에 왔다는 주장이 꽤 힘을 받고 있다. 제프리 삭스 하버드대 교수와 리처드 울프 매사추세츠대학 교수가 대표적인 비관론자다.
리처드 울프 교수는 미국의 무력 수준을 정조준한다. 중동 매체 알자지라는 지난 3월 7일(현지시간) '미 제국은 이제 끝났다: 경제학자 리처드 울프'라는 제목의 심층 인터뷰를 보도했다. 울프 교수는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번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지 못했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미군은 베트남에서 패했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도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쟁은 이기지 못했다. 이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도 패배하려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가 시작한 전쟁이다(미국이 2008년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킨 것을 의미)."
제프리 삭스 교수는 지난 11일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열린 외교포럼에서 미국의 경제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미국인이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쓰기 때문에 무역적자가 발생한다. 30조 달러를 벌어서 31조 달러 가까이를 지출한다. 트럼프는 온갖 상점에서 빚(신용카드)으로 물건을 사들이고서 상점 주인이 자신을 속여서 무역적자가 났다고 말하는 셈이다."
미국의 가난은 아직 주요 경제지표에 반영되지 않았다. 고용률이 급격하게 하락하지도 않았고, 물가상승률도 낮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일 '경제 지표를 제외하면 트럼프는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기사에서 "캐나다·멕시코·중국에 적용된 첫 관세가 3월 4일에 발효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고, 수입업체가 관세를 대비해 미리 물량을 비축해 뒀기 때문에 새로 부과되는 관세가 소비자들에게 전가되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WSJ 기사의 속뜻은 트럼프 관세가 미국 실물경제를 덮치기까지 몇달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관세 충격이 막상 닥치면 미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관세는 가장 먼저 수입품 가격에 포함돼 수입 물가를 상승시킨다.
비싸진 수입품을 원자재로 사용하는 내수 및 수출품 가격도 덩달아 오른다. 소비자는 상품 소비를 줄인다. 소비의 감소는 다시 수입 물량에 영향을 주고, 결국 미국 정부가 거둬들이는 관세 규모는 예상보다 적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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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 연구팀이 지난 10일 발표한 보고서는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다(표 참조). 먼저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관세 부과로 2025년 4190억 달러에 이르는 세금 수입을 얻는다.
그런데 이는 수입품 3190억 달러어치 제품의 가격을 상승시킨다. 그래서 미국이 최종적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관세는 3880억 달러에 불과하다. 10년간 관세는 수입품 6조9370억 달러어치 가격을 상승시키고, 관세 수입은 5조2460억 달러에서 4조4960억 달러로 쪼그라든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관세가 소비자에게 모두 전가되면 본격적으로 줄어든다. 와튼스쿨 보고서는 미국 GDP 증감률이 올해 –0.4%, 10년 후인 2034년 –0.7%, 2054년에는 –5.1%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역성장이다. 소비가 줄면, 평균 임금도 줄고,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도 쪼그라든다.
트럼프 주장대로 미국인의 소득세를 모두 탕감해 주고, 나머지 재정적자를 표면금리가 0%인 100년 초장기 국채를 해외 동맹국들에 강매해 충당한다고 해도, 전세계는 미국의 재정적자를 나눠서 부담하느라 가난해질 것이고, 결국 미국의 경제는 축소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벌인 관세전쟁의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다는 얘기다.
■ 미중 없는 세상=문제는 여기까지가 트럼프의 이상적인 그림이란 점이다. 트럼프의 말처럼 미국 경제의 역성장 규모는 과도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패권 싸움에서 빗겨나 있는 세계도 존재한다. 미국과 중국이 없는 세상이다. 미국은 2022년 전세계 총생산량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면 미국 시장의 비중은 크지 않다. 자동차를 최종재라고 한다면, 차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엔진이나 다른 부품들을 모두 중간재라고 한다. 부가가치를 생산 활동에서 새로 창출한 가치라고 하는 이유는 최종재에서 생산에 들어간 중간재 가격을 모두 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수입량이 전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22%에서 점차 줄어들어 2020년엔 15%까지 떨어졌다(유엔무역통계). 같은 기준으로 중국의 수입이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에 불과하다. 미국과 중국이 상당 기간 생산량과 첨단기술이라는 무기로 밀어붙였지만, 새로운 가치는 갈수록 적어졌다는 뜻이다.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트럼프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을 빼도 세계 무역의 74%는 여전히 건재하다. 세계 무역량의 74%에는 무관세를, 나머지 미국과 중국의 25%에는 고율의 관세를 매기면, 세계 무역에서 미·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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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1일 백악관 정원에서 부활절 행사로 받은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구체적으로 보면 트럼프가 1기 행정부에서 탈퇴한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협정(CPTPP)' 11개국과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은 노르웨이, 스위스, 그리고 한국의 수입량을 합치면 세계 무역의 22%가량이다. EU는 15%, 중국과 러시아가 속한 브릭스 11개국 수입량 비중도 15% 정도다.
미국이 관세전쟁을 통해 세계 무역에서 거리를 둘수록 이 경제블록 간 거리는 더욱 좁혀진다. 캐나다는 트럼프 1기 이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를 시작했다. 이제 타결이 임박했다. 한국은 2015년 EU와 FTA를 체결했고, 지난 3월 15일에는 전자상거래 등 디지털 무역 관련 디지털통상협정을 체결했다. 한국과 EU의 교역량은 미중과 상관없이 증가할 일만 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협상에 응하지 않자, 고율의 관세를 여러 차례 부과하며 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관세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서면 무역은 끊긴다. 고율의 관세를 백번 더 부과해도 의미가 없다. 결국 트럼프가 이 사태를 시진핑과 해결하지 못하면, 미중을 뺀 나머지 세계가 세를 넓힐 기회를 얻는다. 과연 트럼프는 여기까지 예상했을까.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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