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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 든 마크롱과 백기 든 한덕수의 차이: 기업 애국심 [마켓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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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연 기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팀이 출국하기도 전인 17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국과 싸우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인터뷰 기사는 20일 공개됐다. 이는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일본과도 다른 입장이다. 한덕수 대행의 저자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지 '기업 혹은 자본의 애국심' 관점에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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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발 관세 전쟁이 세계시장을 흔들고 있다. [사진 |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세계적 관세 부과를 '사건의 결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사건의 시작점'이라고 봐야 할까. 적어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트럼프발 관세 전쟁을 전자로 인식하는 것 같다. 마크롱은 트럼프 1기부터 대통령직職을 유지해 온 몇 안 되는 주요국 정상이다.

마크롱은 '트럼프 관세'가 현실화한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이 잔인하고 근거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시기에 미국 경제에 수십억 유로를 투자하는 유럽 기업이 있다면, 그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가 미국과 이 상황을 명확하게 할 때까지 최근 미국 투자를 발표한 프랑스 기업들은 이를 보류해야 한다."

반면 몇몇 나라는 트럼프의 관세 부과를 '사건의 시작점' 정도로 본다. 그래서 이들은 준비하지 않은 만큼 대항 의지만 있고, 방법 따윈 없다. 캐나다와 덴마크가 그렇다. 자국 영토(그린란드)를 위협받았지만, 덴마크는 이를 일정 부분 애국 마케팅으로 활용했고, 캐나다는 주로 정치 캠페인에 사용했다.

총선 참패가 예상됐던 캐나다 자유당은 반미反美 정서 하나로 단독 과반 정부를 구성해 마크 카니 총리를 배출했다. 캐나다는 사실상 이미 미국 경제에 종속돼 있다. 수출의 75%, 수입의 30% 이상이 미국과의 교역에서 나온다.

그런데 어떤 나라는 트럼프의 관세를 사건 자체로도 보지 않은 채 순응하려 든다. 안타깝게도 한국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지난 20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에 '싸우지(fight)'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는 미국의 25% 관세 부과를 받아들이고, 방위비 분담금을 100억 달러(약 14조2000억원)로 지금(1조5182억원인)보다 약 10배 인상하며(지난해 10월 시카고 경제클럽 대담), 알래스카 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수조 달러를 투자하고(3월 4일 의회 연설), 미군 군함으로 추정되는 배를 수백척 만드는(지난해 11월 6일 한미 정상 통화) 동시에 대미對美 무역흑자조차 내서는 안 된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협상에 유효한 메시지를 냈지만, 한덕수 권한대행의 말이 이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안 장관은 지난 20일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서 "섣불리 협상을 타결하기보다는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들이 있다"며 "급한 쪽이 여러 가지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 장관은 지난 3월 30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경제통상장관회의에서도 두 나라 장관 사이에서 엑스자로 손을 잡고 찍는 사진을 연출해 미국 정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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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언론보도 종합]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왜 '트럼프 관세'를 사건의 결과물로 받아들이고, 자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만류한 걸까. 마크롱이 20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휴전 100주년 기념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앞에서 한 다음과 같은 연설이 배경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국가주의는 애국심을 배신하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국가) 이익이 우선'이라고 말할 때, 국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인 도덕적 가치를 없앤다. (1차 세계대전의) 오래된 악마들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올 4월과 2018년 11월 마크롱의 두 연설이 합쳐질 때 그가 기업들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진다. 바로 애국심이다. 기업이 애국심의 발현자보다는 수혜자로 자리 잡은 한국과 달리 서구권은 국가가 기업에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버클리대 교수를 지낸 법률 역사가 막스 라딘은 1930년대에 "기업은 사업을 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공공 서비스를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로마 후기 현대 기업과 유사한 조직들은 황제와 원로원의 특별 보조금을 받아 운영됐지만, 영국 의회가 주식회사의 유한책임을 법적으로 확립한 1855년에서야 현대 기업 형태가 확정됐다는 얘기다. 기업의 소유주가 부채, 종업원의 범죄 등을 모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게 현대 법인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법인의 독립적 권한과 책임이 강조되면서 기업의 애국심이 제한된 것은 1900년대 초 미국에서다. 포드자동차 대주주였던 호레이스와 프랜시스 닷지 형제는 배당금을 놓고 창업자 헨리 포드와 소송을 벌였다.

포드는 국가 경제를 위해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려 했고, 모든 기업가들이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들의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미시간주 대법원은 1916년 "기업은 대체로 주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며 "포드가 인도주의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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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1년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은 다시 기업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회로 회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해외로 회사를 옮겨 일자리도 세금도 창출하지 않는 것을 두고 '기업의 반역행위'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1기, 바이든 행정부, 트럼프 2기 모두 기업의 애국심을 강조했다.

이는 15세기 이후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이 해외 식민지를 건설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던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중상주의 국가가 자국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를 수입하고, 이렇게 만든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적절한 관세다.

심지어 '트럼프 관세'에는 안보우산부터 기축통화 문제까지 너무 많은 안건이 담겨있다. 그런데도 이를 모른 척하고, 싸우지 않겠다는 한덕수 대행과 같은 정부 인사가 있다면, 기업에 앞서 그에게 먼저 애국심을 요구해야 한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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