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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혹독한 고문에도 "칼날 향해 나아가리라" 끝내 순교[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양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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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21일 주기철 목사 순교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주기철 목사/사진=주기철 목사 기념관

주기철 목사/사진=주기철 목사 기념관



81년 전 오늘, 1944년 4월21일.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한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주기철 목사가 순교했다.

일제강점기 장로교 목사를 지낸 그는 항일독립운동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끝까지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옥중에서 47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붙잡혀 5년 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는다"며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에 피를 요구한다면 내가 먼저 죽겠다"고 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내 죽음이 한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과 조선교회를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주기철 목사를 기리기 위해 2015년 개관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사진=한국관광공사

주기철 목사를 기리기 위해 2015년 개관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사진=한국관광공사



주 목사는 1897년 11월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현 진해시 웅천1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맏형을 따라 교회에 간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는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감화돼 기독교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1923년부터 목회를 시작했다. 부산 초량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담임목사를 지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할 당시 평양은 일제의 타깃이 됐다. 한국교회를 잡으려면 평양 교회를 잡아야 한다는 게 일본의 생각이었다.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처음에는 신앙과 양심을 잘 지켰지만 강요가 심해지자 점점 타협하는 교회가 생겨났다. 1938년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고 합리화하며 일제에 굴복했다.


그러나 주 목사는 달랐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해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됐고 심한 구타를 당했다. 옥중에서 매질하러 온 일본 경찰관에 "당신도 언젠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텐데 지금 이 죄들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경찰관이 하려던 일을 접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주 목사는 건강이 나빠져 석방되기 했지만 신사참배를 계속해서 거부해 재차 구속 수감됐다. 몇 차례 풀려났다 다시 잡혀가기를 반복하면서 5년 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주기철 목사를 기리기 위해 2015년 개관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사진=한국관광공사

주기철 목사를 기리기 위해 2015년 개관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사진=한국관광공사



그는 잠깐 교회로 돌아올 때마다 주옥 같은 설교를 남겼다. 옥생활 중 했던 기도가 설교 소재로 쓰이곤 했다. 1938년 평북노회가 신사참배 찬성 결의안을 가결했을 때 주 목사는 감옥에서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면서 "드리리다, 이 목숨이라도 주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도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라"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께 의탁한다"고 기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1944년 4월21일 아내 오정모 사모와 마지막 면회를 하고 그날 밤 순교했다. 넷째 아들 주광조 장로 간증에 따르면 주 목사는 당시 "내 죽음이 한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교회와 조선을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내 오 사모는 "당신은 꼭 승리해야 한다"며 "당신의 승리가 바로 한국교회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어 아내가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느냐"고 묻자 주 목사는 손을 한 번 흔들고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좀 먹어봤으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십자가에서 예수가 "목마르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아내 오 사모는 주 목사 순교 이후에도 남편처럼 굳건하게 신앙과 양심을 지켰다. 그는 장례식 도중 교인들을 향해 "지금 울 때가 아닙니다"라며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 목사는 나약해서 죽은 게 아니라 당연히 죽어야 할 시간에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주 목사는 이후 정부가 항일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양성희 기자 y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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