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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공격해 사망하게 한 광부들 고개 숙여 “잘못된 일”... 사북탄광 45년 만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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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탄광 사건 45년 만의 화해
“이제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네요. 우리가 던진 돌에 경찰이 죽고 다친 건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20일 오후 7시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영화관 영월시네마에서 이원갑(84) 사북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이 손을 내밀자, 진문규(72) 전 영월경찰서 순경이 이씨를 부둥켜안았다.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 탄광 노동자들의 집단 항쟁인 ‘사북 사건’ 당시 대치했던 광부와 경찰들은 사건 이후 이날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이들은 피를 흘려가며 대치했다. 그러나 이날은 “이제는 용서하고 화해하자”고 했다.

사북 사건은 1980년 4월 21일부터 나흘간 회사 측의 임금 소폭 인상과 열악한 노동 환경 등에 반발한 탄광 근로자들이 정선군 사북읍 일대에서 일으킨 총파업 사건이다. 광부들은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사북지서와 회사 사무실을 부쉈고, 진압 경찰들에게 돌을 던졌다. 유혈 사태로 번지면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70명 가까이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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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 탄광 광부들이 열악한 근로 환경과 임금 등에 반발해 총파업을 벌였다. 사진은 ‘사북 사건’ 당시 광부들과 주민들이 몰려다니고 있는 모습./조선DB


그간 사북 사건에서 광부들은 일방적 ‘피해자’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45년이 지난 이날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감독 박봉남) 상영회에 참석한 당시 광부·경찰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건 초기 ‘가해자’는 오히려 광부들이었다. 광부 측 대표 이원갑 회장과 순경으로 현장에 투입됐던 전직 경찰 진문규, 이종환(75), 최병주(85)씨는 광부들이 제대로 된 방어 도구도 없던 경찰들에게 돌을 던져 두개골 골절·뇌진탕 등의 부상을 입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사북 사건 당시 항쟁 지도부였던 이원갑 회장은 이날 오후 영화 상영회에 앞서 당시 부상 경찰들과 만나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참 죄송한 일, 잘못된 일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회장은 “광부들도 스스로를 지키려다 보니”라면서도 “날카로운 돌을 던져 경찰들을 다치게 한 건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살아있는 동안 사죄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그가 눈시울을 붉히자 부상을 입었던 경찰들이 손을 잡고 “함께 잊자”고 했다.

1980년 4월 21일 탄광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가 발발했다. 노동자 3000여 명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사무실을 부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탄광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굴다리 ‘안경다리’에 진입하려 하자 광부들은 다리 위에서 돌을 던졌다. 방패도 없었던 경찰들이 잇따라 쓰러졌다.


최병주 전 순경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3000명 넘는 광부들이 돌을 던지는데 이북에 간 것보다 무서웠다”고 했다. 이종환 전 순경은 “광부들도 분노가 많이 쌓여 있었겠지만…. 20cm가 넘는 돌덩이가 우리 머리로 날아오는데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시절 모두가 너무 과격했다”고 했다. 이 회장은 “거듭 죄송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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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강원도 영월군의 한 극장에서 1980년 정선군 사북읍에서 발생했던 사북사태의 광부대표인 이원갑(오른쪽)씨가 당시 사고로 피해를 입은 경찰들에게 사과 편지를 준비해서 낭독하고 있다. / 조인원 기자


당시 6개월 차 순경으로 현장에 투입됐다가 두개골 골절·함몰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진 전 순경은 아버지도, 자신도 광부 출신이었다. 그의 육촌 형이 광부들의 편에 서 경찰들을 공격했다. 방어용품이 없었던 경찰들은 인근 상점의 양철 간판과 덧문을 뜯어 방패 삼았다. 발을 헛디뎌 헬멧이 떨어진 사이 돌이 머리를 때렸다. 진 전 순경은 “의식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함께 입원한 광부들을 보면서 ‘저놈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며 분노가 들끓었다”며 “하지만 나중엔 ‘저분들도 살려고 저랬겠지’라며 음료수도 나눠 먹었다”고 했다.

사건이 끝난 뒤 광부들 상당수가 ‘국가 권력’에 피해를 본 게 사실이다. 이 회장을 포함한 광부 200여 명은 보안사·경찰·헌병대로 구성된 합동 수사단의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와 물고문 등 가혹 행위를 당했다. 임산부를 포함한 부녀자 40~50여 명도 성적 가혹 행위를 당했다. 군 검찰은 이 회장에게 소요죄, 특수 공무 방해 혐의 등으로 10년을 구형했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 2005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도 두 차례 광부와 주민들에게 국가가 공식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광부들과 주민들은 경찰뿐 아니라 또 다른 집단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당시 광부들과 주민들은 회사 편을 드는 노조 간부를 폭행했다. 노조 지부장 이재기씨도 찾아다녔지만 그가 잠적하고 안 보이자 이들은 아내 김순이씨를 붙잡아 기둥에 묶은 뒤 집단 폭행했다. ‘어용’ 노조를 규탄한다고 하더라도 아내 김씨가 폭행당할 이유는 없었다. 김씨는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몽둥이로 맞았다. 이 회장은 이날 영화에서 사과 편지를 쓰고 “김씨를 매달아 놓고 폭행과 난행을 저지른 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이날 상영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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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강원도 영월군의 한 극장에서 1980년 정선군 사북읍에서 발생했던 사북사태를 다룬 영화 '1980 사북'을 연출한 박봉남 감독(맨왼쪽)이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북사건’ 당시 대치했던 경찰들과 광부가 박 감독의 설명을 들으며 손을 잡고 있다./조인원 기자


박봉남 감독은 지난 5년 반 동안 광부들과 당시 부상 경찰, 김씨 가족들을 일일이 접촉해 당시 사건의 이면을 파헤쳤다. 마음을 닫았던 경찰들과 김씨 가족들은 박 감독을 만나지 않으려 했지만, 집요한 설득 끝에 이들 모두를 만나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들었다. 박 감독은 “(광부·경찰들의) 편을 들지 않고 각자의 입장과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이 사건이 남긴 상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 했다”고 했다.

☞사북 사건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회사 측의 임금 소폭 인상과 어용 노조에 반발해 정선군 사북읍 일대에서 발생한 탄광 근로자들의 총파업 사건. 유혈 사태로 번지면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약 7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81명을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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