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강희철 열사의 22주기 추모식 모습. 사진 신현수 |
신현수 |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지난주 일요일, 자주·민주·통일 전사 강희철 22주기 추모행사에 다녀왔다. 마석 모란공원을 오가는 길에 일년 열두달 동안 겪는 온갖 날씨를 단 하루에 경험했다. 아직은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라는 걸 하늘이 알려주려는 듯, 햇볕이 나더니 곧바로 태풍급 강풍에 벼락이 치고 비와 우박이 뒤섞여 쏟아졌다.
강희철은 1962년에 태어나, 2003년 4월 전국연합에서 회의하다 쓰러진 며칠 후인 4월13일 41살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참으로 견결한 한평생을 살다간 후배였다. 강희철은 이른바 ‘학출’이었지만 평생을 전태일을 따라 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전태일의 삶이 어떤 건지 온전히 보여주고 이 세상을 떠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강희철은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전태일 열사의 바로 왼쪽에 묻혀있다. 강희철 바로 뒤에서는 이소선 어머니가 지켜보고 계신다.
강희철을 비롯한 마석 모란공원에 누워계신 열사들이 윤석열 일당이 벌인 이번 내란 사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벌떡 일어나 무덤을 박차고 뛰어나오고 싶었을까? 윤석열은 파면당한 뒤에도 관저에서 일주일 이상 머물며 거의 매일 저녁 파티를 벌였고, 서초동 자택 ‘귀가 쇼’를 하면서는 또 국민의 혈압을 높였다. “파면 소식 듣고 둔기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라거나,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습니다”라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더니 서초동 자택에 도착해서는 “다 이기고 돌아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떠들었다. 파면돼 임기를 채우지 못했는데도 웃으며 “어차피 뭐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지껄였다. 한 시민이 건넨 모자를 받아 머리에 쓰기도 했는데, 모자에는 ‘메이크 코리아 그레이트 어게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뇌가 모두 썩은’ 자니까 그러려니 하면서도, “비상조치 이후 미래 세대가 엄중한 상황을 깨닫고 자유와 주권 가치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거나 학교 점퍼를 입은 대학생을 미리 준비시켜 놓고 포옹하는 등 ‘미래 세대’를 끌어들여 ‘이용’할 때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든다.
윤석열 일당의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실무 책임자로 일했던 문인단체의 한 후배가 광고지만도 못한 ㅅ신문에 쓴 “‘부정선거’를 믿지 않는 벗들에게”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이 후배는 바로 얼마 전까지 “실로 어마어마한 가짜뉴스의 본산지”라며 ㅅ신문을 비판한 칼럼을 썼었다.(경인일보 2025년 1월21일치) 그런데 후배는 바로 그 신문에 정반대의 입장으로 표변한 칼럼을 썼던 것이다. “벗들이여, 지금 우리는 ‘극우’와 싸워야 할 때가 아니다. ‘부정선거=음모론’이라는 ‘선전’에 가스라이팅 당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야당과 여당, 사회 전반에 포진한 부정선거 세력에 맞서 국민주권의 ‘공화국’ 체제를 지켜야 할 때다”라며 오히려 ‘벗’들을 걱정했다. 어째서 후배가 이렇게 바뀐 것일까. 몇달 만에 그의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후배가 현재 국립 ㅅ대학교 국문과 교수라서 당황스러웠던 건 아니다. 후배는 1990년대 중반 ㅊ계간지로 화려하게 등단한 문학평론가이고, 시집도 발간한 ‘작가’라서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후배가 걱정한 벗 중에는 나도 포함되는 것일까?
지난 13일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강희철 열사의 22주기 추모식 모습. 사진 신현수 |
앞으로도 가끔 마석 모란공원에 찾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열사들의 삶에 비추어 나는 지금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려고 한다. 후배 강희철, ‘우리들의 예수’ 전태일, 노동운동가 이옥순 누님, ‘전태일의 벗’ 조영래 변호사, ‘분단의 벽을 부수고 통일의 문을 연’ 문익환 목사님 묘소 앞에서 내 삶을 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기도하려고 한다. 살면서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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