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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러, 금지된 집속탄 써 온몸 수십개 파편”… 우크라 눈물의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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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러시아군의 탄도 미사일 공격으로 35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한 수미시 중심가 참사 현장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잔해를 정리하고 있다. /안나 치히마


※편집자주: 이 기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 언론기관인 공익 저널리즘 연구소(PIJL)가 본지에 보내 온 것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벌이는 전쟁 범죄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가능한 원문을 살리되, 일부 내용을 축약해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우크라이나 북동부 국경 도시 수미(Sumy)에서 지난 13일 러시아군이 미사일 공습을 가했다. 최소 35명이 숨지고 1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중엔 어린아이들과 외출했다가 몰살된 가족, 학교에 들리려다 참변을 당한 소녀도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이 시작된 이후, 이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상 공습 중 최악의 참사다. 부활절을 앞둔 ‘종려 주일(Palm Sunday)’ 아침, 러시아군이 발사한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 두 발이 시내 중심가를 강타했다. 수많은 사람이 수미 도심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군은 국경 인근 보로네즈 혹은 쿠르스크 지역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수미는 국경에서 불과 30㎞ 떨어져 있어 발사 후 수 분 만에 미사일이 도달했다. 첫 폭발은 시청과 인근 문화센터 주변에서 발생했고, 두 번째 폭발은 구조 활동이 시작된 후 이뤄졌다. 피해를 최대화하려는 이른바 ‘더블탭(double-tap)’ 공격이다. 국제법상 금지된 전쟁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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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부상당한 수미시 주민들이 지역 병원에 입원해 치료 받고 있다. /안나 치히마


병원에 실려온 부상자 대부분은 10여 개 이상의 금속 파편이 몸에 박혀 있었다. 장기가 파열되거나 사지가 절단된 이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집속탄(集束彈·cluster bomb)’을 미사일 탄두로 사용했다는 강력한 증거다. 작은 자탄(子彈) 수십 개에 또 수천 개의 파편이 들어있는 무기로, 국제법상 민간인 지역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외과의사인 아르템 피르스텐코는 “파편이 너무 많아 모두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 평생 몸에 지닌 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공격 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이 지역 병원에는 30여명의 부상자가 남아 있다. 응용물리학 연구소 경비원이던 빅토르 보이텐코(56)는 두 번째 폭발 당시 건물에 있었고, 파편이 척추를 부러뜨려 온몸이 마비됐다. 알라 쉬르토칼라(76)는 친구들과 시골로 떠나기 위해 버스에 타고 있다 폭발로 인한 파편에 팔을 크게 다쳤다. 그는 “한 소년이 버스 문을 열어줘서 살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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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수미시 공격이 벌어진 날 버스에 갖힌 시민들을 구해낸 키릴로 일리아셴코(13)군과 그의 어머니 마리나. /안나 치히마


소년 키릴로 일리아셴코(13)는 공습 직후 목숨을 걸고 버스 문을 열어 10여 명을 구했다. 그는 어머니 마리나와 함께 할머니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소년은 창문을 깨고 탈출한 뒤, 밖에서부터 문을 열어 다른 승객들을 구했다. 그는 머리에 여러 개의 금속 조각이 박혔다. 이 중 두 개는 두개골 깊숙이 들어가 빼낼 수 없었다. 레슬링 선수인 키릴로는 “내 머리는 괜찮습니다. 5월엔 시합에 나갈 수 있어요”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마르티넨코씨 가족은 공습으로 가족 3명 전체가 숨졌다. 아들 막심(11)과 그의 부모 미콜라(41)와 나탈리아(49)는 시내 나들이 중이었고, 세 명 모두 공습으로 숨졌다. 남은 이는 17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외할머니 나디야(75)뿐이다. 사위와 딸, 손자의 관 앞에서 그는 “저주받을 푸틴 놈, 지옥에 떨어져라”며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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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13일 사망한 나탈리아 마르티넨코와 그의 남편, 아들 등 가족 3명의 장례식에서 나탈리아의 어머니 나디야가 딸과 손자, 사위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다. /안나 치히마


막심의 반 친구들은 장례식장에서 함께 울었다. 한 친구는 그의 관 위에 축구공을 올려놨다. 선생님은 “막심의 강아지 렉스가 (주인을 찾아) 여전히 학교로 찾아온다며 울먹였다. 친구들은 교정에 막심을 기리는 나무를 심기로 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북부군 지휘부 회의가 열린 건물을 타격해 군인 60명을 제거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지 언론과 시민들의 증언, CCTV 영상은 러시아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첫 미사일이 맞은 곳은 회의실이 아니라 시민 강연과 문화 행사가 열리는 마을 회관이었고, 그 앞을 지나던 19세 여성 스비틀라나와 다리야 등 두 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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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13일 수미시 공격으로 숨진 마르티넨코 가족 3명의 장례식 모습. 마을 주민들과 가족의 친구들이 모여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안나 치히마


두 번째 미사일은 그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던 시민들과 구급차를 향해 떨어졌다. 차를 타고 지나다 부상자들을 도우려던 교사 마리나 추데사와 그의 어머니 류드밀랴가 이 두 번째 공격으로 숨졌다. 국제 인도법 전문가 안나 미키텐코는 “설령 군인이 일부 있었다 해도 군사적 이익보다 민간인 피해가 크면 정당화될 수 없다”며 “러시아는 또다시 국제법을 어겼다”고 지적했다. 현장에선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구조 활동을 겨냥한 공격은 명백한 전쟁범죄라는 것이다.

공습이 일어난 교차로엔 계속 꽃다발과 인형, 추모의 글이 쌓이고 있다. 희생자 중엔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루피 포스터를 좋아하던 소년 올레흐 칼리우센코(17), 자녀와 함께 외출했다가 숨진 어머니, 카페에서 일하다 구조 활동에 나섰다가 매몰된 교사도 있다.

이번 공격은 보수 성향 미국 언론들도 이례적으로 크게 다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러시아가 실수를 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를 놓고 “도심 한복판에 집속탄을 쏘는 것이 실수로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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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35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한 수미시 도심 광장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과 장난감들이 쌓여 있다. /안나 치히마


공습 나흘 뒤, 수미의 한 빵 공장을 드론이 공격해 여러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도 벌어졌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미국산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은 10기 미만으로, 전체 영공을 방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폴란드는 자국 방어를 위해 48기를 요청한 상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9일 30시간 동안의 부활절 휴전을 발표했다. 하지만 수미 시민들은 “러시아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제노사이드(Genocide·민족 말살)”라고 입을 모은다.

러시아의 공습은 최근 두 달 사이 우크라이나 12개 전선 지역에 두 배로 증가했다. 미국과의 휴전 논의가 제기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오히려 집속탄과 미사일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오늘도 “국제사회는 이 참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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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마모노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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