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1주기를 앞둔 지난달 29일 오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 일대에서 팽목 기억순례와 현수막 게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진도/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
2025년 4월4일,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내란 수괴 윤석열을 만장일치로 파면하던 순간 광장의 시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눈물을 터뜨렸다. 그 눈물에는 내란 극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4개월간의 험난한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는 성취감과 기쁨, 서로의 곁을 지킨 동료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 위헌적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란 수괴의 궤변을 깨끗이 파쇄한 헌법재판소 결정문이 주는 감동, 무엇보다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될지도 모른다는 숨죽인 불안이 깨끗이 해소되며 찾아드는 안도감과 해방감이 고루 녹아 있었다.
시민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승리를 자축하던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섰다. 이정민 10·29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고 이주영씨 아버지)이었다. 시민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인사로 발언을 시작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인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인파에 갇혀 숨을 쉴 수조차 없던 순간, 우리 유가족 어머니들은 그날 밤이, 그리고 아이가 느꼈을 고통과 공포가 떠올라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집회에 나오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159명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는 데에 윤석열 퇴진이 그 첫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쓰디쓴 눈물이 차올랐다. 2022년 10월29일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위해 싸워온 유가족들이 감내한 인고의 무게, 그 무게를 안고서 계엄 날 국회로 달려가고 윤석열 퇴진 광장의 맨 앞줄을 지키다 마침내 파면의 기쁨이 광장을 가득 메운 이 순간에 마음 놓고 기뻐하는 대신 다시 시민들에게 ‘진상을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하는 심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 심정을 그저 가늠해보는 것만으로도 슬픔과 고통, 미안함과 결의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마구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이정민 위원장의 말처럼 윤석열 파면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 회복의 시작일 뿐이다. 응원봉 광장을 함께 지키며 파면을 끌어낸 우리는 이제 사회 곳곳에서 퇴행하거나 지연된 민주주의를 다시 구체적으로 회복하고 실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각자의 자리에서 기울여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그 세부 과제의 하나는 지금껏 발생한 사회적 참사에 대한 우리의 늦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10·29 이태원 참사는 물론 올해로 벌써 11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진상을 밝히겠습니다’ 매년 4월16일이 찾아올 때마다 노란 리본을 달며 우리가 수없이 되뇌어온 이 아픈 말들을 책임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지난 10년간 진상규명을 위해 세차례나 국가 차원의 공적 조사위원회를 가동했음에도 우리는 왜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을까. 세월호는 도대체 왜 침몰한 것일까. 우리는 왜 304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에겐 아직도 답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밝혀진 진실의 조각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l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외 지음, 진실의힘(2024) |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은 이 쉽지 않은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답하려 애쓴 결과물이다. 박근혜 정부의 첫번째 조사위원회가 활동 중이던 2016년, 특조위 조사에 도움이 되기 위해 당시 접근 가능한 자료들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펴냈던 진실의힘 세월호 기록팀은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해 지난해에 이 책을 새로 펴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매년 4월이면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구호가 울려 퍼졌지만, 모두가 바라는 ‘진상’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드러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 특별법 제정을 통한 공적 진상규명 활동이 왜 항상 미흡한 결과를 내고 마는지, 진상규명의 전제, 절차,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지려는 시도도 없었다. 특조위에 이어 선조위, 사참위 등 모든 세월호 참사 조사위원회가 종료되었는데도 4월16일 그날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 이제 필요한 것은 1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알아낸 세월호 참사의 사실을 모두 엮어내는 일이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모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패했다.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낸 세상은 여전히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강동 싱크홀 참사가 일어나고 곳곳에서 중대 재해가 계속 발생하는 세상이다. 시민의 안전에는 아랑곳없이 독선에 빠져 모든 시민의 권리를 위헌적 계엄으로 박탈하는 윤석열 같은 정치적 돌연변이가 활개 치는 세상이다. 이제 윤석열을 파면했으니 ‘나라다운 나라’가 만들어질까?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를 윤석열의 몫으로 전부 떠밀어놓으면 다시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하나의 행위는 밝혀진 사실을 읽는 것이다. ‘잊지 않겠다’라고 말해온 지난 11년간 우리가 진상규명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마침내 밝혀낸 것과 밝혀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밝혀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과 그럼에도 인정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지 답하기 위해 앞선 이들이 만들어낸 소중한 기록을 함께 읽는 것이다. 써야 할 책임을 느낀 이들은 임무를 완수했고, 그 결과물은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이라는 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기록을 읽고 기억할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이 기록을 읽어 내려가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응원봉 광장 너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기록을 꼭꼭 씹어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이 2016년에 기록했고 2024년에 새로 기록하고 있듯이, 세월호 참사는 규정을 지키지 않고 관행을 멈추지 않고 임무를 다하지 않은 이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만들어냈다. 우리가 이 기록과 기억에서 도망치려 할 때,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려 할 때, 한국 사회는 2014년 4월15일 세월호가 출항했던 그 밤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참사를 불러온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의 기록과 기억을 붙들고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장혜영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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