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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엘리트는 적”… 트럼프, 로펌·명문대와 ‘문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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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색 지우기 위해 연일 강공
조선일보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하버드대 전경. /연합뉴스


전 세계 로펌(법무법인) 중 매출 1·2위인 미국의 ‘커클런드 앤드 엘리스’와 ‘레이섬 앤드 왓킨스’가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프로보노(무료 공익 변론) 협약을 맺고 각각 1억2500만달러(약 1781억원) 상당의 법률 서비스를 무료 제공하기로 했다. 두 로펌의 최고급 인력이 법률 상담을 맡고, 정부 정책에 소송이 제기될 경우 직접 재판에도 나설 전망이다. ‘폴 와이스’ ‘윌키’ 등 다른 로펌 일곱 곳도 4000만~1억2500만달러 수준으로 비슷한 협약을 맺었다. 16일 액시오스 등 미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는 로펌 아홉 곳에서 총 9억4000만달러(약 1조3398억원) 상당의 법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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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진경


로펌들이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시절 강화된 이른바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기조를 끊으려는 트럼프의 압박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진보 색채가 강한 로펌에 각종 제재를 가하자 잇따라 프로보노 카드를 내밀며 백기를 든 것이다. 이에 대학을 표적으로 DEI 지우기에 나섰던 트럼프가 전선(戰線)을 로펌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소수자를 우대하는 DEI가 백인·남성 등을 역차별하고 능력주의를 퇴조시킨다고 본다. 강경 보수 진영은 진보적 엘리트가 밀집한 대학과 로펌을 ‘문화 전쟁’의 주요 진지(陣地)로 지목해 왔다.

트럼프는 우선 자신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로펌을 표적으로 삼았다. ‘커빙턴 앤드 벌링’은 2020년 대선 패배를 뒤집으려 한 혐의 등으로 트럼프를 재판에 넘긴 잭 스미스 전 특검에게 무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퍼킨스 코이’는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의 경쟁자였던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캠프의 법률 자문을 맡았었다. 트럼프는 이들을 비롯한 대형 로펌을 상대로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동해 정부기관 청사 출입 및 당국자 접촉 금지, 자문 계약 종료 등 제재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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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변호사는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한다" - 지난 2일 미국 뉴욕의 로펌 '폴 와이스(Paul Weiss)' 앞에서 반(反)트럼프 시위대가 "진짜 변호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아닌 애완견"같은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트럼프가 과거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 로펌 소속 변호사들의 연방 정부 보안 인가를 박탈하자, 로펌은 트럼프 행정부에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굴복했다. /EPA 연합뉴스


지난달에는 법무부 산하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를 통해 주요 로펌 20곳에 서한을 보내 고용 정책이 DEI와 연관이 있는지 밝히라고 요구하며 법조계 전반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엘리트 로펌을 포함한 어느 곳에서든 (역)차별을 뿌리 뽑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런 압박에 프로보노를 약속할 경우 EEOC 서한을 철회해주면서 로펌 길들이기에 나섰다.

로펌이 타깃이 된 것은 트럼프가 대학과 함께 법조계를 진보 사상의 본산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대형 로펌은 워싱턴 DC, 뉴욕 등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대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소속 변호사 역시 대부분 아이비리그를 비롯해 진보 성향이 강한 명문대 로스쿨(법학대학원) 출신이다.

주요 로펌은 민주당 바이든(2021~2025년 재임)과 버락 오바마(2009~2017년)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시기에 프로보노 형식으로 소수 인종, 성소수자, 여성, 이민 관련 사건에 적극 관여했다. 퍼킨스 코이 등 일부는 소수 인종 출신을 우대해 인턴으로 채용하는 사내 DEI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문화 전쟁’에 박차를 가하는 데는 DEI로 대표되는 미국 진보 진영의 ‘정치적 올바름(PC)’이 일상을 옥죌 만큼 과도해졌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보수 진영에선 이를 ‘워크(woke·깨어 있음)’라는 표현으로 비꼬면서 PC주의에 대한 반감을 지난해 대통령 선거 캠페인의 주요 ‘무기’로 삼았다.

워싱턴 정가의 한 소식통은 “유명 로펌의 변호사 상당수가 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그(he)’나 ‘그녀(she)’ 아닌 ‘그들(they)’을 쓴다”며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통적 성별 구분이 다양한 성적(性的) 정체성을 억압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했다. 대학 중에는 화이트보드의 ‘화이트(white)’가 백인을 의미하므로 인종차별적이라며 ‘노트보드(note board)’ 같은 대안을 권장하는 곳도 있다.

DEI의 또 다른 거점인 대학을 겨냥한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도 계속되고 있다. 하버드대는 입학·채용에서 다양성 우대를 중단하고 반(反)유대주의 성향 학생을 제재하라는 등 정부의 요구를 “표현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며 거부했다. 이에 따른 보복성 보조금 삭감을 예상하고 지난달 7억5000만달러의 채권을 발행해 ‘실탄’ 마련에 나섰다.


이에 정부는 하버드대의 면세 지위 박탈을 예고했다. 미국 대학이 교육 목적의 비영리 기관으로서 받는 면세 혜택이 박탈되면 연구 지원, 기부금 확충 등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CNN은 16일 소식통을 인용해 “국세청이 재무부로부터 박탈 요청을 받았으며 곧 최종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미 연방 보조금 지원이 중단된 브라운대는 지난주 300만달러를 대출받아 긴급 자금을 마련하는 등 주요 대학이 보조금 삭감에 대비해 잇따라 유동성 확보에 나선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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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박국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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