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노는 “인수·합병에서 감정은 필요 없으며, 계약서로 하는 전쟁”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다. 심지어 윤주노는 자신의 임원 자리가 걸린 골프장 매각을 포기한다. 윤주노는 송 회장에 대한 충성이나 임원 되기를 택하지 않고, 골프장 직원들의 고용과 인수·합병 전문가로서의 원칙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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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1회. 백발의 윤주노가 등장하는 장면. 나이도 감정도 알 수 없는 독특한 비주얼로, 굉장한 카리스마를 뿜는다. 제이티비시(JTBC) 제공 |
‘협상의 기술’은 인수·합병(M&A)을 소재로 한 기업 드라마다. 시청률을 10% 넘기고 종영하였는데, 생소한 세계를 엿보는 재미에 현실 비판과 윤리적 성찰까지, 과연 안판석 드라마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평범한 상황에도 긴장을 유발하는 웅장한 음악이 때로 과하게 느껴지지만, 짧은 장면만으로 인물들 간 역관계를 드러내는 압축적인 연출이 일품이다.
배우 이제훈이 백발로 등장한다. 나이도 감정도 알 수 없는 독특한 비주얼이 굉장한 카리스마를 뿜는데, 절제된 가운데 미묘한 표정과 눈빛 변화만으로 극 전체를 끌고 간다. 안판석 드라마에 자주 출연하는 검증된 배우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안현호, 차강윤이 비중 있는 배역으로 호연을 보여주었다.
인수·합병 속 인간적 가치
드라마 시작과 함께 인수·합병 전문가 윤주노(이제훈)가 온다는 말에 전전긍긍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비춘다. “인수·합병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살리는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니까”라는 통념과 “백사. 핏기 하나 없는 냉혈한, 사이코패스”라는 윤주노에 대한 풍문이 난무한다. 물론 이는 드라마를 통해 완벽하게 부정되기 위한 밑밥이다.
드라마는 회의 장면 하나로 산인그룹의 재정 위기를 요약한다. 올해 안에 11조원의 부채를 갚고, 주가를 10만원 이상으로 방어하지 못하면 부도가 나는 상황이다. 윤주노는 몇해 전 주가 조작 혐의로 외국에 가 있다가, 송 회장(성동일)의 부름으로 귀국하는 길이다. 자신의 결백과 형 죽음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복심을 품고서. 드라마는 12부작 중 10회에 걸쳐 윤주노가 실력을 발휘해 회사를 살리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2회 동안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에필로그와 쿠키 영상을 통해 시즌2를 예고한다.
먼저 윤주노의 실력을 보자. 산인그룹은 건설만 흑자이고, 나머지 계열사는 적자다. 그룹의 2인자인 하 전무(장현성)는 산인건설만 남기고 나머지를 팔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윤주노는 반대로 알짜인 산인건설을 판다. 그것도 예상가인 7조원보다 훨씬 비싼 8조5천억원을 받아낸다. 그리고 30억원으로 망한 게임업체를 사서, 산인이 지금껏 시작하지 못했던 온라인 쇼핑 사업을 시작할 기반을 마련한다. 상장 시기를 놓친 자전거 회사를 상장하여 내려가는 주가를 방어하고, 송 회장이 리조트를 사느라 초래한 550억원의 재정 위기는 리조트를 600억원에 되팔아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를 속이거나 가치를 부풀린 적은 없다.
윤주노는 우선 기업의 내재적 가치에 집중했다. 산인건설을 팔기 위해, 골칫거리인 재건축 문제를 해결해 실제로 가치를 높이고 협상 과정에서 제값을 받아냈다. 게임 에피소드에서도 망한 게임이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온라인 쇼핑 사업에 활용하면 엄청난 가치가 있음을 알아보고 접근했다. 자전거 에피소드에서도 400만원대 카본 자전거 출시를 위해, 일본 기어 회사의 할인 납품 계약을 따냈다.
윤주노는 이 과정에서 상대를 무력화시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설득의 신공을 발휘한다. 독거 할머니, 게임 개발자, 일본 장인, 회장 딸. 이들은 타자화되기는 쉽고, 소통하기는 힘든 상대다. 하지만 윤주노는 이들의 세계를 존중하며, 상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윈-윈의 거래를 성사시킨다. 빈손으로 쫓겨날 처지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할 수 있게 해주고, 게임도 사랑도 도둑맞은 개발자는 억울함을 배상받고 계속 게임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가업을 빼앗겼다는 원한을 품었던 일본 장인은 자부심을 품고 가업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게 했으며, 삶의 희망을 놓았던 회장 딸은 리조트의 삶도 누리고 생의 의지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윤주노는 “인수·합병에서 감정은 필요 없으며, 계약서로 하는 전쟁”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다. 심지어 윤주노는 자신의 임원 자리가 걸린 골프장 매각을 포기한다. 골프장의 전 직원을 해고하는 계약인 데다, 산인건설을 팔아놓고 법을 우회하여 다시 건설업을 하려는 송 회장의 꼼수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윤주노는 송 회장에 대한 충성이나 임원 되기를 택하지 않고, 골프장 직원들의 고용과 인수·합병 전문가로서의 원칙을 지킨다.
여기엔 굉장한 역설이 존재한다. 안판석은 전작 ‘졸업’에서 가장 자본화된 대치동 사교육 시장에서, 공교육이 잃어버린 교육의 본원적 가치가 실현되는 희귀한 순간을 보여주었다. 인수·합병 역시 상품이 아닌 기업을 사고파는 가장 자본화된 분야로, 거기엔 인간의 가치가 배제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협상의 기술’은 그 안에 인간다움이 존재하고, 오히려 이를 통해 노동이 보호되며(적자 리조트의 직원들은 인수·합병을 통해 구조조정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내부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기업 혁신의 동인이 형성되는 기이한 틈새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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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10회. 송 회장(맨 오른쪽)이 매각한 건설업을 다시 하려는 꼼수를 쓰려고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가, 산인건설 매수자에게 들키자 머쓱해하는 장면. 제이티비시(JTBC) 제공 |
타당한 결말
드라마는 골프장 매각과 과거 사건을 다룬 후반부에 긴장의 수위를 확 끌어올린다. 사내 정치의 쫄깃함과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제대로 담겼다. 심지어 마지막 회는 정치뉴스에 회자하는 주가 조작과 ‘통정거래’가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혹자는 결말과 반전이 미진하고 뜻밖이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복선으로 충분히 예고하고, 시즌2를 예비한다는 면에서 나쁘지 않다. 드라마는 게임회사 대표가 자신이 당했던 ‘해킹이 아닌 절도’의 방식 그대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정보를 빼내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해고된 산인건설 사장(윤제문)이 골프장 매수자로 재등장하며 뒤통수를 쳤듯이, 해고된 하 전무가 사모엘펀드 이사로 재등장해 놀라움을 안긴다. 주가 조작에 가담한 하 전무를 철저하게 응징하지 못한 것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고, 시즌2의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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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12회. 주가 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져 해고된 하 전무가 사모엘펀드 이사가 되어 채권자 자격으로 산인그룹 회의에 나타난 장면. 제이티비시(JTBC) 제공 |
드라마는 송 회장과 테오 사모엘펀드 이사의 관계를 사진 한장과 쿠키 영상 하나로 추측하게 한다. 7회에서 송 회장의 가족사진은 테오 이사가 송 회장의 아들임을 암시한다. 그때까지는 송 회장과 관계가 좋은 아들인지, 의절한 아들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인 주식을 잠식해 경영권 집어삼키기에만 관심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쿠키 영상으로 산부인과 장면을 끼워 넣어, 송 회장이 눈여겨 봐둔 여의사와 테오 이사가 결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송 회장과 테오 이사는 ‘승계되는’ 부자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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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12회. 송 회장이 눈여겨 보았던 여의사가 산부인과에서 태아가 아들임을 듣는 장면. 남편은 테오 이사로,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즉 테오 이사가 송 회장을 ‘승계하는’ 아들이며, 부자 사이에 애증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제이티비시(JTBC) 제공 |
극복해야 할 두 세대
드라마는 윤주노로 대변되는 젊고 합리적이고 전문성과 실력을 갖춘 인물과 대비되는 두 종류의 빌런을 보여준다. 한명은 노골적인 하 전무고, 또 한명은 사태의 배후인 송 회장이다. 하 전무는 초반에는 평범해 보였으나, 갈수록 비열함이 커진다. 50대 후반에 대기업 넘버2에 올랐으니, 굉장한 실력자일 것 같지만 본령은 권모술수다. 정치질과 협잡에 능해, “형님 동생” 하며 줄 세우기를 한다. 나름 협상 전문가인데, 그의 협상은 얕은 술수로 약한 상대(게임 개발자)는 윽박지르듯 후려치고, 강한 상대(사모엘펀드)에게는 내 약점을 다 내보이면서 구걸하는 것이다. 거래처의 뒷돈을 받고,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아랫사람에게 덮어씌운다. 그는 언제나 회사의 안위보다 자신의 이익과 자리를 우선한다. 그리고 징하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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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8회. 하 전무(맨 왼쪽)가 사모엘펀드에 550억원을 더 빌려달라고 협상하는 장면. 하 전무는 오너리스크 등 민감한 정보를 누설해가며, 주식 담보를 두배로 제공하고 이자율은 엄청나게 높이는 위험한 거래를 추진한다. 제이티비시(JTBC) 제공 |
한편 송 회장은 산업화 세대의 상징처럼 보인다. “2세 경영을 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했지만, 사모펀드를 이용해 아들에게 경영권을 편법 승계시키려는 듯하다. 딸에게는 500억원대 불법 증여를 했다. 건설을 비싸게 팔아놓고, 건설업을 또 하겠다며 바지사장을 내세운다. 법 따위는 무시해도 그만이다. 그는 낡은 세대의 사고와 노욕을 대변한다. 사주와 풍수지리에 심취해 있으며, 제 차 꽁무니에 절하는지, 백미러로 보고 충성도를 평가한다. 기업을 비민주적으로 운영해, 아무도 송 회장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온라인 쇼핑 사업의 진출 시기도 놓쳤다. 딸에게 사준 리조트로 인해 부채 문제가 생기자, 송 회장은 은근히 윤주노가 산인 자금으로 리조트를 사주기 바라는 뜻을 비추었다. 윤주노가 자금 문제와 딸의 수술까지 해결하자, 송 회장은 윤주노에게 하사하듯 임원 자리를 제안한다. 그리곤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골프장 매각을 맡긴다. 하지만 윤주노가 원칙과 윤리를 따르자, “니는 임원감은 아니다”라며 철회한다. 흡사 왕처럼 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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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기술’ 12회. 산업화 세대의 상징처럼 보이는 송 회장. 직원의 실력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하며, 마치 왕처럼 군다. 제이티비시(JTBC) 제공 |
이토록 노욕이 그득한 산업화 세대의 권력과 유산이 여전하고, 실력은 없으면서 정치질로 닳고 닳은 민주화 세대의 권모술수가 들끓는 생활 세계에서, 새로운 세대의 실력자는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어조로 인간다움과 원칙을 지켜내며, 조직을 혁신할 것인가. ‘협상의 기술’은 인수·합병 전문가를 통해 ‘가장 자본화된 방식으로 인간화된’ 신인류를 보여준다. 윤주노는 인공지능(AI) 시대와 글로벌 통상질서 전환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소통과 혁신의 히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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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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