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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가족 살해한 가장, 작년 시작한 분양사기가 비극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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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부모와 처자식 등 일가족 5명을 살해한 50대 가장 A씨가 지난 15일 경기도 용인서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불 꺼진 적막한 아파트 모델하우스. 경기 용인에서 일가족 5명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가장 이모(56)씨가 쓰던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동업자 A씨는 “사업 부진에 내몰리자 막판에 벌인 아파트 분양 마케팅이 이 사건의 화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17일 본지가 입수한 광주 동부경찰서의 압수수색 영장에 따르면, 이씨가 주도한 광주 동구 산수동 일대 민간 임대 아파트 창립추진위원회와 분양 업무 대행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2년 후 입주 가능하고 100% 보증금 반환 가능하다” “땅도 거의 매입됐고, 남은 땅도 다 매입한다” “HUG(주택도시보증공사) 보증에 가입돼 있으니 믿어도 된다”라고 속이면서 투자자를 모았다.

이씨는 지난 14일 경기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80대 부모, 50대 아내, 10대와 20대 딸 등 일가족 5명을 수면제를 먹인 뒤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이씨가 가족을 살해하기에 앞서 아파트 분양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분양 사기 내용이 담긴 고소장을 접수받고 이씨 등을 수사하고 있었다.

이씨는 3년 전인 2022년부터 광주에서 민간 임대 아파트 분양 사업을 시작했다.

A씨는 “이씨는 다른 아파트 분양 업무 대행사 간부로 일하다가 지금 문제가 된 땅이 사업성이 높다고 보고 본인이 직접 민간 임대 아파트를 세우려 했다”며 “이씨가 대행사를 차려 투자자를 모집하고 나는 월급을 받으면서 현 부지 소유주들에게 토지 사용 승낙을 받는 작업을 맡기로 역할을 나눴다”고 말했다.


이들이 아파트를 세우려 했던 부지는 약 7000평 규모로 2022년 당시 절반 상당의 토지를 확보해 광주 동구청 건축과에 지역주택조합원 모집 신고를 했다.

경찰은 “이들의 조합 설립을 위한 토지 사용권원 확보율이 허가 기준인 50% 미만인 30.47%에 불과해 모집 신고가 반려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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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처자식 등 일가족 5명을 살해한 50대 가장 A씨가 지난 15일 경기도 용인서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A씨는 “토지 확보율이 문제가 아니라 광주 동구청이 몇년 전 만들어진 주차장과 도로 등이 포함된 지구단위계획을 이유로 조합 인가에 부정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벌어진 일”이라며 “이후에도 충분히 진행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역주택조합 대신 협동조합형 민간 임대주택 형태로 분양 사업을 추진하려고 2023년 2월 창립추진위원회를 세웠고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고 했다.

협동조합형 민간 임대주택은 협동조합 기본법에 따라 30가구 이상 민간 임대주택을 지어 조합원에게 우선 공급하는 사업이다. 정식 절차대로라면 추진위원회를 꾸려 발기인 5명 이상을 모집한 뒤 부지 80% 이상의 사용 동의서를 확보해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때 발기인들은 투자자 형태로 출자금을 협동조합 창립위원회에 내는데, 조합 설립 전 발기인 상태에서는 출자금 반환 및 철회 등에 관한 법적 규정이 없어 계약을 해지해도 투자금을 반환받기 어렵다.


경찰은 이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에 “민간 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조합을 설립하지 않고 조합원이 아닌 발기인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다”고 적시했다.

이들은 343세대 규모 민간 임대아파트를 세우려 했지만, 지난해 5월까지 투자자를 50여 명밖에 못 모았다. A씨는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아 투자자를 못 모으니 돈이 없어서 기껏 만든 모델하우스에서도 쫓겨나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사무실에서 버티기도 했다”고 했다.

부진을 거듭하던 분양 사업은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투자자 161명을 추가로 끌어모으면서 갑자기 활기가 돌았다. 이씨가 다른 분양 업무 대행사를 불러들인 뒤 생긴 일이었다.

A씨는 “이씨가 투자자에게 계약금 3000만원을 받으면 80%인 2400만원을 주기로 하고 B대행사에게 투자자 모집을 맡겼다”며 “이때부터 분양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계약금의 상당액이 분양업체 수수료 등 성과금으로 소진되는 구조에서 회원 가입 철회를 요구하는 일부 피해자들에게 계약서 내용을 빌미로 반환을 거부하면서 임대 사업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 피해자가 양산될 우려가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B 대행사가 투자자를 끌어모으려고 압수수색 영장에 명시된 것처럼 투자자가 혹할 만한 거짓이 담긴 분양 광고 등 마케팅을 했고, 투자자들이 이에 속아 낸 돈이 대행사에 성과금 등 형태로 흘러갔다는 것이 경찰의 시각이다.

이씨의 민간 임대 아파트 창립위원회에 돈을 낸 투자자는 200여 명으로 금액으로는 60억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계약을 해지하고 돈을 돌려달라고 한 투자자는 60여 명, 금액은 18억원 상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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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처자식 등 일가족 5명을 살해한 50대 가장 A씨가 지난 15일 경기도 용인서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A씨는 “계약금 80%를 주겠다고 하니 대행사가 눈에 불을 켜고 광고를 했다”며 “대행사 팀원급이 받는 계약 성사 수당만 1건당 400만원에 달했고, 투자자가 계약을 해지하려 해도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전화도 안 받았다”고 했다.

이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사업을 벌이다 계약금 반환을 놓고 민형사 소송이 들어오니 이씨가 B대행사와 돈을 토해내자는 협의도 했다”며 “그 와중에 일가족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B 대행사 대표 C씨를 아파트 분양 사기 혐의로 조사 중이다. 압수수색 영장에는 C씨의 공동 범행에 대해 “민간 임대 아파트 계약자 모집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업체 대표로, ‘2년 후 입주 가능’ ‘10년 후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 분양 전환’ ‘국가가 보증하는 서민 민간 임대 아파트’란 말로 거짓말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A씨는 “돈을 돌려주자는 협의는 잘 안 됐던 것으로 안다”며 “이씨는 자신이 분양 업무 대행사에 근무하면서 아파트 분양에 성공해 돈도 만져봤던 사람”이라고 했다.

이어 “사업이 안 풀리니 이씨 가족이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전세로 옮겨 살았다”며 “돈이 없어 해외 유학 가 있던 딸도 불러들였다”고 했다. 또 “이씨는 평소 아버지에 대해서도 미대 출신으로 교장까지 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왔다”며 “본인도 기독교 신자인데 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진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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