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가리지 않고 수많은 캐릭터 연기
연극할 땐 ‘한정된 배역’만 들어와 고민
‘중년 아이돌’ 넘어 ‘노년 아이돌’ 되고파
연극할 땐 ‘한정된 배역’만 들어와 고민
‘중년 아이돌’ 넘어 ‘노년 아이돌’ 되고파
![]() |
16일 개봉한 영화 ‘야당’에서 마약 범죄자 잡는 옥황상제 형사 ‘오상재’를 연기한 배우 박해준을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부부의 세계’에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며 시청자 뒷목을 잡게 한 불륜남 ‘이태오’가 ‘서울의 봄’ 속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반란군 장군 ‘노태건’이 됐다가 이젠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는 ‘양관식’이 돼 전국에 ‘관식이 병’을 유발하고 있다. 16일 개봉한 영화 ‘야당’에서는 마약사범 잡는 형사 ‘오상재’로 분해 뛰어다닌다. 올해 배우 박해준의 행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반기 tvN ‘첫, 사랑을 위하여’와 디즈니플러스 ‘북극성’으로 또다시 안방극장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해준은 종횡무진 다양한 캐릭터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바라던 바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 |
2012 영화 ‘화차’에서 사채업자 악역으로 출연한 박해준 |
“한 작품 속 캐릭터로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보다는 빨리빨리 전환을 해주고 싶어요. 지금도 다른 작품을 촬영하고 있어요. 계속 다른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감사하죠.”
박해준의 연기 인생에 초석이 된 작품은 그가 36세 때 만난 영화 ‘화차’다. 연극무대에 설 때만 해도 그는 깔끔하고 훤칠한 외모 때문에 맡을 수 있는 역할이 한정돼 늘 연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지만, ‘회차’ 출연 이후 그 제약이 사라졌다.
“사실은 다양한 역할을 맡고 싶었거든요. 멋있는 역할, 멋을 부려야 하는 역할보다는 자연스러운 역할에 관심을 가졌어요. 혹은 진짜 악역이나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요. 그런 역할에 누가 날 써주려나, 갈증이 분명 있었죠. 주변에선 저한테 세련되게 생겼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제가 속은 촌스러워요. ‘된장’ 같다고나 할까요.”
![]() |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에서 영업3팀에 온 경력직 천과장을 연기했다. |
그러다 ‘화차’ 변영주 감독이 박해준에게 김민희(차경선 역)를 괴롭히는 악덕 사채업자 역할을 맡겼다. 덕분에 박해준의 연기 스펙트럼은 이때부터 넓혀지기 시작했다. 박해준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은, 악역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역할을 맡게 됐다”며 “분장의 도움까지 받으면 이젠 내가 못 할 역할이 있을까 싶다”고 뿌듯하게 말했다.
2014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은 박해준을 처음으로 대중의 뇌리에 남기는 작품이 됐다. 당시 박해준은 주인공 ‘장그래’(임시완)가 소속된 영업3팀으로 발령받은 천관웅 과장으로 등장했다.
훤칠한 외모의 ‘천과장’ 박해준은 오상식 과장(이성민), 김동식 대리(김대명), 장그래가 끈끈한 유대를 맺어가는 것과 대비되며 혼자 겉돈다. 속내를 보면 ‘경력직 입사로 지지기반이 약해 사내 정치에 민감하고, 술자리에 당당하게 빠지지 못하는’ 슬픈 K-직장인이다. 그렇게 회식 자리에서 술을 진탕 퍼마셔도 집에 와 맥주 한 캔을 더 따야만 비로소 갈증이 풀리는, 외로운 도시 남자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 |
2018년 tvN ‘나의 아저씨’에서 겸덕으로 분한 모습 |
그리고 4년 뒤 2018년엔 tvN에서 또 ‘나의 아저씨’를 통해 ‘정희’(오나라)가 밤마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라고 슬프게 되뇌게 만드는 스님 ‘겸덕’이 됐다. 수많은 한국 ‘아저씨’들이 주인공 박동훈(故 이선균)에 감정 이입했다면, 여성 시청자들은 정희의 슬픈 일편단심을 가엾어하며 같이 훌쩍이곤 했다. 부처의 뜻에 감명받아 속세의 아귀다툼을 훌훌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가 버린 남자. 돈, 직업뿐만 아니라 이름도, 사랑하는 여자도 버렸다. 겸덕이 기거하는 암자를 찾아가 ‘돌아오라’고 오열한 정희에게 꽃을 들고 찾아와 진짜로 안녕을 고하는 장면은 수많은 시청자에게 눈물바람을 일으켰다. 악역은 아닌데 이미 정희에 감정을 동기화한 여성들에겐 ‘나쁜 놈’은 아니지만 분명 ‘나쁜 남자’다.
진짜로 나쁜 놈은 같은 해 개봉한 영화 ‘독전’에서 비열한 마약업자 ‘박선창’으로 보여줬다. 조직의 물갈이를 견디고 살아남을 만큼 질기고 지독한 인간이지만, 끝내 ‘이선생’으로부터 끔찍하게 팔이 잘리는 결말을 맞이한다. 명작으로 평가받는 ‘독전1’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그를 알게 됐다.
![]() |
영화 ‘독전’속 순도 100% 악역 박선창 |
그리고 드디어 2020년 ‘사빠죄아좌’, ‘한소희 불륜남’ 등 수많은 수식어를 양산하며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JTBC ‘부부의 세계’의 ‘이태오’로 찾아온다. 이태오는 동갑내기 의사 부인 지선우(김희애)의 경제력에 의지하며 작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체를 운영한다. 고산시 유지의 딸이며 20대 중반의 미인인 여다경(한소희)과 바람이 났고,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이를 선우에게 들키고 망신을 당하고 나서는 당당하게 “가정까지 버릴 생각은 없었어”,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를 부르짖어 시청자들의 짜증·분노·어이없음 수치를 한도 초과시켰다.
![]() |
영화 ‘서울의 봄’ 속 ‘전두광’과 함께 반란을 주도한 ‘노태건’을 박해준이 연기했다. |
이태오의 여운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역사적 인물을 본뜬 영화 ‘서울의 봄’의 ‘노태건’을 제외하고는 최악의 남편 이미지가 박해준에게 오래 남았다. 2025년 봄을 강타한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에서 소년· 청년 시절 관식으로 이천무·박보검이 연기할 때만 해도 도대체 ‘사빠죄아좌’ 박해준이 어떻게 관식이를 이어받을지 상상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결과는 이미 알다시피 ‘국민 아부지’가 되며 대성공. 길을 걷다 중년 관식의 ‘교복’ 회색 숏패딩만 보아도 눈물이 솟구친다는 과몰입 사례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기혼 남성들 사이에선 ‘나도 관식이 같은 남편’이라고 셀프 주장하는 ‘관식이병’도 창궐하는 중이다.
![]() |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에서 국민 아부지 ‘양관식’이 된 박해준. 회색 패딩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증상을 창궐시켰다. |
박해준은 “예전엔 남자들이 집에서 아내한테 얼마나 대접받고 사는지 자랑하는 게 보편적인 모습이었는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었다. 관식이처럼 사는 게 자랑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는 아내 오유진 씨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관식이’다. 박해준은 “아내가 ‘오빠는 관식이랑 가까운 면이 많다’고 해줬다”며 “적어도 50% 정도는 진실이지 않을까”라고 웃었다.
그간 쉼 없이 달려오며 여러 필모를 남겨 온 25년차 배우 박해준. 이젠 ‘하늘의 명’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이 눈앞이다.
“‘중년의 아이돌’이란 칭찬도 감사하지만, 이를 넘어 ‘노년의 아이돌’도 해보고 싶어요. 저 혼자 완전히 튀어 오른 원톱 주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특별히 없어요.‘폭싹 속았수다’도 그렇고 ‘야당’도 그렇고 좋은 작품은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단역이 모두 좋아야 만들어진다는 걸 느꼈거든요.”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