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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관료로서도 귀감인 '풍석 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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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관료로서도 귀감인 '풍석 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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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 서유구 선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임원경제지'를 완성하고 돌아가신 분이다.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세대로 겨우 두 살 차이다.

김조순과 셋이 정조의 총애를 받다가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 다음 해에 일어난 신유박해 때 조선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셋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라진다.

김조순은 후에 세도정치의 대명사로 불리며 당대엔 떵떵거렸지만 후대에 와서 극심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가고 풍석 서유구는 지금의 파주 등등을 떠돌며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백과사전 성격의 '임원경제지'를 짓는다.

다산과 달리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실사구시의 사유와 감각을 모은다.


그런 경험의 집적이 실생활의 대부분을 다룬 '임원경제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유구 선생은 그러다가 관료로 복귀해 성심껏 수행하다가 다시 임원 곧 시골로 돌아가는데 전라도 관찰사도 관료 생활 중 하나다.

당시는 김조순의 세도정치로 전국 특히 지방이 피폐할대로 피폐했었다.


해안가와 섬마을에도 기근이 심하고 유리걸식들이 휑하니 걷고 있었다.

서유구 선생은 둔전, 오늘날로 말하자면 협동조합을 생각하였다.

역병이 돌고 흉년마저 심했던 해였다.


서유구 선생은 무섭게 늘어나는 유리걸식들이 눈에 밟혀 고뇌를 거듭하다가 경작되지 않은 땅을 생각해냈다.

그 땅을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의 터전으로 삼으면 뭔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유랑 걸인들을 경작되지 않은 땅에 모이게 하고 군역을 면제해주려 했었다.

그들이 생산하는 물건에 십 년간 세금을 물리지 않고 토지 개간을 협동으로 이루어나가고…….

종자를 살 돈은 비책으로 마련하고 도살 범칙금을 통해 소를 얻으려 했었다.

한갓 관찰사로선 도저히 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될 일을 시도하려고 몸부림쳤다.

왕조 시대이기에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감탄이 이는 내용이다.

서유구 선생의 관료로서의 귀감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임원경제지'는 16개의 주제로 구성되는데 그중 하나가 '예규지'이다.

이것은 장사와 유통에 관한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라 할 수 있는 서유구 선생은 농업뿐 아니라 공업, 상업까지 실제적인 눈을 돌려 치밀하고 폭넓은 기록을 남긴다.

가령 예규지 안엔 당시 각 고을과 고을 간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도표로도 정리되어 있다.

가령 대구와 경주까지는 150이라고 적혀 있다.

안동에서 울산까지는 370, 황해도 해주에서 은율까지는 180이다.

예규지엔 당시 고을마다 열린 오일장의 위치, 장 서는 날, 특산물들이 적혀 있다.

조선 전국 각 고장의 오일장을 실제 콘텐츠로 소개하며 각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도 기록하고 표로 정리해서 당시 농민이건 상인이건 실생활에 이득이 되고 개인이건 공동체의 부흥을 실제적 도움으로 꿈꿨다.

서유구의 지극정성이 실로 감탄스러우며 관료로서도 귀감인 것은 무수한 사례 중 하나인 이걸로도 알 수 있다.

필자는 십 수년 전부터 서유구 선생과 그의 '임원경제지'에 접할 기회가 있어 그에게 매력을 느껴 '소설 서유구'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최근에 출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 배경지식으로서 많은 텍스트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의 글과 그 분 외 연구소 박사들이 번역하고 풍석문화재단 등에서 발간한 '임원경제지', 진병춘 선생님의 평전인 '풍석 서유구' 등 많은 텍스트들을 읽고 참조하며 큰 도움을 받았음을 이 지면을 활용해 밝히며 감사를 드린다.

지금 시대는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지만 관료들의 보신주의도 그 중 하나로 지적되곤 한다.

필자는 서유구 선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서유구 선생이 관료로서도 너무도 훌륭하고 감동이 일어 지면의 기회가 된다면 그 점 또한 말하고 싶었다.

이 시대의 관료들이 모범을 삼아도 충분한 분이 서유구 선생임을 그분을 소설화한 작가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명훈 소설가 문화칼럼,관료,이명훈,소설가